▲ 김단야 선생(1901~1938)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레닌을 만나다

1922년 1월21일 모스크바 크렘린. 극동민족대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회의에는 조선·중국·일본·몽골 등 9개 민족 대표 144명이 참석했다. 대회는 같은해 2월2일까지 열렸다. 이 중 조선에서 온 대표단은 52명이었는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 청년단체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이가 김단야(金丹冶)였다. 김단야는 김규식·여운형, 그리고 여성단체 대표자격으로 온 김원경과 더불어 의장단으로 피선됐다. 대회가 끝나고 2월20일 각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는 17인과 함께 레닌을 만나게 됐다. 말로만 듣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지도자와의 만남은 스물두 살 청년이었던 김단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이후 레닌처럼 투철한 사회주의자로서 혁명가의 한길을 걸었다. 후일 그는 조선일보 기자가 돼 레닌 사후 1주년인 1925년 1월22일부터 2월3일까지 레닌을 만난 인상기를 11회에 걸쳐 연재했다. 조선인으로서 레닌을 만났다는 자체가 기사가 될 수 있었는데 기자 본인이 회견한 경험을 썼기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김단야는 1901년 경북 김천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연도는 1899년, 1900년으로도 나온 기록이 있으나 그가 쓴 글에서 1901년생으로 했기에 이를 인용한다.) 그의 본명은 김태연(金泰淵)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나와 1915년 대구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인 계성학교 고등보통과에 진학했다. 이듬해인 1916년 12월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정당하다고 보는 미국인 교장과 일본 교사에 저항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 일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던 가족들과 크게 불화하게 되자 1917년 1월 무작정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했다. 그는 스스로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팔이·우유배달 등의 온갖 일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학비를 대 줄 테니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조선에 와서 그해 9월 서울의 배재학교에 입학했다.

배재학교 재학 시절 서울에 있는 중등학교의 대표들로 구성된 비밀결사에 몸담으면서 <반도의 목탁>이라는 지하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학생운동에 열정적으로 참가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김천의 개령면 동부동으로 갔다. 그해 3월24일 개령보통학교 졸업식과 마을 사람의 혼인잔치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일장연설을 하고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출동한 기마헌병대에 의해 진압되고 체포돼 대구지법 김천지청에서 태형 90대라는 야만적인 형벌을 받았다.

사회주의자로 성장하다

곤장 90대를 맞고 나온 후에도 그의 항일독립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에 들어가 만주에서 활동할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으다가 일경에 추적을 받게 되자 그해 12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박헌영·임원근과 더불어 고려공산청년단을 결성하고 8월에 책임비서로 선임됐다. 이들 3인은 삼인당(三人黨) 또는 화요파 트로이카로 불렸는데 이후 평생동지로서 활동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고려공산청년단을 대표해 참여하고 3월에 상하이로 돌아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됐다. 그해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충국을 서울로 이전하기 위해 입국하다가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신의주에서 체포돼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예심 기간까지 1년10개월의 형을 살고 1924년 1월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하게 됐다. 잠시 고향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조선일보·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시절 키도 크고 성격도 밝은 데다 글 솜씨도 좋고 활달해 동료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기자라는 신분을 적절히 활용해 혁명활동을 수행했다. 사회적 영향력과 선전효과가 있는 기사를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조직과 연락사업을 하는 데 활용했다. 기자증을 가지고 있으면 취재 명목으로 지방을 다니거나 해외로 다닐 수 있어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상하이특파원을 자처해 상하이에 있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와 국제공산청년회와의 연락업무를 하기도 했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이 됐고 한양청년연맹과 화요회에 참가했으며 1925년 2월에는 전 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됐다. 그해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참석해 중앙위원이 됐다.

서울·모스크바·상하이를 넘나든 활동

1925년 10월15일 조선일보에서 해직되고 그해 12월 재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6년 1월부터 7월까지 조산공산당 기관지 <불꽃>의 주필이 됐다. 그해 4월 순종의 사망소식을 듣고 ‘상(喪)에 복하고 곡하는 민중에게 격(檄)함’ 등의 격문을 만들어 국내로 보내며 6·10 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같은해 8월 모스크바에 있는 사회의주의 최고의 엘리트 양성코스인 국제레닌학교에 들어갔다. 박헌영과 베트남 독립운동지도자 호치민 등과 같이 수학했다. 1929년 레닌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당 재건운동을 하기로 결의해 7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국내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온 1929년 국내에서 원산총파업 같은 노동자 투쟁이 크게 일어나는 등 노동운동이 고양되고 있었다. 그는 먼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들을 만나 조직하기 시작했다. 10월 중순까지 서울·인천·함흥 등의 조직들과 연계를 구축했다. 그해 11월13일 ‘조선공산당재건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직부를 담당했다. 노동자 중심의 지역별 단위를 만들고 그것을 전국적인 공산주의자협의회로 묶어 당을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1930년 2월 일제 경찰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검거망을 피해 국내를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다시 9월 중국 상하이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등사판 출판물인 <콤뮤니스트>를 발간하면서 배포망을 구축해 당 재건조직의 기초로 삼으려고 했다. 1931년 3월 “공장·광산·철도·부두 등 계급투쟁의 분화구 속으로! 그 속에서 선전하라. 조직하라, 투쟁의 불을 지르라!”는 창간선언과 함께 <콤뮤니스트> 창간호를 냈다. 모스크바에 있는 박헌영은 김단야에게 글을 보냈으며 코민테른에 보고하는 임무도 맡았다. 박헌영과 그의 아내 주세죽은 국제레닌학교와 모스크바공산대학을 마치고 난 후 1933년 1월 상하이로 건너와 김단야와 함께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둘은 서로 협력해 <콤뮤니스트>를 7호까지 발간했다. 인천·부산·평양·마산·진남포의 도시와 농촌에서 20명이 넘는 조직원이 있는 20개 남짓한 비합법조직이 구성됐다. 어려운 가운데 사업을 했지만 조직은 더디게 성장했다. 그런 가운데 부산과 인천에 있던 <콤뮤니스트> 조직이 파괴됐다. 게다가 1933년 7월 박헌영이 체포됐다. 일제 경찰이 잡으러 온 인물은 김단야였으나 박헌영이 붙잡힌 것이다. 박헌영이 구타와 고문 속에서 시간을 버는 사이에 김단야는 피할 수 있었다.

국내 연결망을 가진 김형선과 여러 동지들이 체포되고 국내 연결망을 구축하려고 들여보낸 정태희마저 체포되자 완전히 절망에 빠져 버렸다. 그는 모스크바에 “나는 모든 것을 잃었고 상하이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주세죽과 함께 1933년 말 상하이를 떠나 이듬해 1월24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의 최후

상해에 남은 김단야와 주세죽. 지치고 힘들고 외로웠던 것일까? 아니면 박헌영이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모스크바로 가서 결혼을 하게 됐다. 이 둘의 결혼 사실을 안 주변 동지들은 비난했으나 6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박헌영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든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면서 아들과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에게 엄청난 운명이 닥쳐오기 전까지는….

모스크바에 간 김단야는 1934년 2월부터 통칭 모스크바공산대학이라고 불리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조선민족부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학부장을 하게 됐다.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은 1921년 4월 식민지 민족들의 해방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코민테른이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교육연한은 2년제로서 교육기간에는 학비는 물론 숙식까지 무상으로 지원해 줬다. 단야는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외국인출판부, 1933년), <어떻게 콜호즈원은 유족하게 되었는가> (외국인노동자출판부, 1934년) 등의 팸플릿을 만들었으며 조선혁명을 이끌 사회주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그러나 스탈린 대숙청의 바람은 그에게도 닥쳐왔다. 그는 일제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1급 범죄자가 됐다. 왜 검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체포되지 않았고 체포됐을 때도 다른 동료들보다 낮은 형량을 받았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쓴 장문의 해명서와 코민테른 동방부 간부들의 선처 요청도 소용없었다. 김단야는 조선공산당 재건사업과 혁명운동에 종사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니 전선에 가서 일하게 해 달라고 현지 파견을 요청했으나 묵살됐다.

그는 1937년 11월5일 ‘반혁명 스파이, 테러단체 결성 혐의’로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 체포됐다. 1938년 2월1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에서 재산몰수와 총살형을 선고받았고 다음날 바로 총살이 집행됐다. 그의 매장지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1급 범죄자의 아내인 주세죽은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됐다. 5년의 형기를 마치고도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없었다. 김단야의 비극적인 최후는 조선사회주의 운동의 비극이었다.



1989년 소련은 김단야와 주세죽을 복권시켰다. 2005년 대한민국은 김단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