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이홍광 장군(1910~1935)

이홍광은 누구인가

중국에서 그를 소개한 잡지나 논문·전기가 1천여편에 이를 정도로 이홍광은 동북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열사다. 전우이자 절친한 동료인 동북항일연군 총사령관 양정우는 “다시 얻기 어려운 장군의 재목”이라 했고, 모택동도 1938년 2월 이홍광의 업적을 찬양했으며, 1946년 5월14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이홍광 동지는 항일연합군 중에서 성망이 제일 높은 수령의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했다.

또한 중국 국공내전 때 조선의용군의 한 지대의 이름이 ‘이홍광지대’였다. 그만큼 조선인들과 만주에서 이홍광의 이름은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길림성 반석시에 있는 조선중학교의 이름이 홍광중학교이고, 교정에는 그의 석상이 ‘항일민족영웅 이홍광 장군’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세워져 있다. 반석시 깍지산 부근 조선족 마을은 ‘홍광촌’으로 불리고, 그의 투쟁 무대였던 신빈현과 이통현에도 그의 기념비와 흉상이 있다. 당연히 북한에서도 그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오직 남한에서만 그의 행적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 경찰 아들 구타로 퇴학 

이홍광은 용인 이씨 가문으로 1910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에서 빈농 이복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홍규(李鴻圭)였으며 이후 이홍해(李弘海)·이홍규(李弘奎)·이의산(李義山) 등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할아버지 이상준은 가난했지만 학식이 있어 이홍광에게 한문·경서 등을 가르쳤으며 손자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가족은 조부와 부모, 남동생 이학해(李學海), 그리고 여동생 경희·경순·경남 등 여덟 식구였다. 남동생은 1934년 소년영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전사했으며 그의 부친도 일제의 탄압으로 별세하는 등 항일가족으로 수난을 당했다.

부친 이복영은 1919년 10세 이홍광을 보통학교에 보냈으나 1년밖에 다니지 못했다. 조선인 아이를 때리는 일본 경찰관의 아들을 구타해 퇴학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때 아버지 이복영도 약 1주일 구류당하고 일경의 감시를 받는 처지가 됐다. 일본어도 배워 꽤 유창하게 말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남다른 정의감을 가졌다.

이홍광은 부모를 따라 1925년 중국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으로 이주했다. 반석현 일대는 평야지대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논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남만주는 연변지역과 달리 이주한 조선인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어 중국인 지주 밑에서 소작을 하며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제는 당시 장작림 군벌정권과 1925년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맺고 조선인들에 대한 박해정책을 펼치고 민족운동을 탄압했다.

지주-소작 관계 수탈, 일제의 탄압, 부패군벌의 박해 등 삼중의 고통은 한창 성장해 나가는 이홍광이 일찍 사회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반석현은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 중 정의부 활동구역이었으며 1927년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 중 ML파 외곽단체인 재만농민동맹의 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개잡이부대’에서 항일유격대로 

1931년 10월 반석현. 7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무장조직인 적위대(赤衛隊)를 결성했다. ‘타구대(打狗隊)’ 즉 ‘개잡이 부대’로 불렸는데 일본 군경이나 만주국 관헌, 그리고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는 밀정이나 부일배들의 조선보민회를 응징하는 부대로 이름이 높았다. 리더가 22세 피 끓는 청년 이홍광이었다. 출범 당시 그들의 무장은 소총 한 자루와 권총 5정, 수류탄 2발에 불과했다.

1932년 봄. 춘궁기 보릿고개를 맞아 지주를 습격해 쌀을 빼앗아 가난한 농민에게 나눠 주는 춘황투쟁을 벌여 나갔다. 조선인과 한족 농민 360여명을 이끌고 하련생이라는 악질 지주의 식량을 몰수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그해 2월 일제의 앞잡이 단체인 반석보민회 회장 박춘포가 만주국군 60여명을 끌어들여 반일회와 반석현위 간부 박동환 등 23명을 체포해 가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홍광은 700여명의 대중을 동원해 그들을 추격했다. 3일 동안이나 추격해 결국 전원 구출했는데 이를 2·9 투쟁이라고 한다.

5월7일. 이홍광은 반석현위 간부들인 이동광(이상준)·양림(김훈)·전광(오성륜)과 더불어 합마하자에서 항일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500여명의 조선인과 한족 농민들이 참가한 대회 이후 악질지주 3인의 양곡 100여섬을 몰수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4일간 계속된 봉기로 교통까지 마비되자 일본경찰은 1천여명의 만주국군을 동원해 포위, 학살하려 했다. 이 위기의 순간에 이홍광이 선전대를 이끌고 선무공작을 했는데, 이러한 정치공세와 참가자들의 위세에 눌려 만주국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봉기는 완전히 승리로 끝났다.

또한 1932년 5월 소작농을 괴롭히고 항일운동을 탄압하던 호란진의 악질 지주 이보동의 자위대를 습격해 소총 20여정을 빼앗고 이보동을 처단했다. 청년들이 이홍광 부대를 찾아와 적위대 입대를 청원해 30여명의 부대원, 신식무기로 무장한 대오로 발전하게 됐다. 6월4일 ‘반석공농반일의용군(磐石工農反日義勇軍)’(약칭 반석유격대)을 출범시켰다.
 

▲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 국내 진격 전투를 소개한 조선중앙일보 기사.

동북인민혁명군 건설과 동흥읍(東興邑) 국내 진격

반석현·유하현·해룡현 등 남만에서 성장한 유격대들이 1933년 9월18일 만주사변 2주년을 맞아 동북인민혁명군 1군 독립사로 통합됐다. 대원 300여명을 거느린 독립사의 사장 겸 정치위원에는 양정우, 참모장으로는 이홍광이 선출됐다. 1군 독립사는 만주에서 민중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선언하며 어떤 무장대와도 항일작전 동맹을 체결하겠다고 밝혔다. 1934년 3월경 신빈현 조선혁명군과 국민부에 통일전선 공작을 했으나 그해 9월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이 순국할 때까지는 뚜렷한 진전이 없었다. 양세봉 사후 위기감을 느낀 조선혁명군측에서 먼저 인민혁명군 사령부에 대표를 보내 연합작전을 요구했다. 이후 1935년부터는 양군의 연합작전이 모색됐고 이듬해부터는 공동작전을 수행하게 됐다.

동북인민혁명군에서 이홍광은 괄목할 만한 투쟁을 했다. 대표적으로 삼원보 전투이다. 1933년 10월1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일본군과 만주국군 1만2천여명이 반석 유격 근거지를 포위 공격해 주민 2천여명이 학살당했다. 독립사는 남방으로 진출하며 200여명의 병력으로 삼원보를 기습 점령했다. 삼원보의 철도공정국과 경찰서·군영 등의 시설을 파괴하고 운동가들을 사찰하는 일제 통화영사관 집사국(緝査局) 국장과 일제의 주구 3명을 처단했다. 또한 많은 무기와 물자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둬 독립사는 겨울을 무난히 지낼 수 있었다. 대중에게 항일구국의 도리를 알리고 항일표어 등 선전활동을 했으며 일반 주민들에게는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홍광은 1934년 3월 통화현 현장과 일본지도관이 유하현으로 회의하러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200여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길가에 매복 기습해 큰 전과를 올렸다. 또 양정우와 함께 200여명이 일본군과 만주국군 1만2천여명의 포위공격을 받게 됐는데, 이홍광은 일본군복을 부하들에게 입혀 새롭게 보충된 일본군 부대로 속여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일본군 부대와 교차하는 순간에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2개 소대를 섬멸했다. 이어 식품과 탄약을 싣고 가던 일본군 차량을 세운 뒤 “왜 이리 보급이 늦냐”고 호통을 친 뒤 군수품을 가로채기도 했다. 그 해 8월께 이홍광 부대는 700여명 규모로 성장했으며 11월 이홍광은 동북인민혁명군 1사(師) 사장 겸 정치위원이란 중책을 맡게 됐다.

이홍광은 1935년 2월13일 새벽 1시께 2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결빙된 압록강을 건넜다. 장총과 권총·기관총 등으로 무장해 동·서·남 세 방면으로 동흥시가에 진입했다. 경찰서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하는 한편 다른 두 방면의 대원들은 동흥 제일의 재산가 장영록의 집 등 친일 주구배를 습격하게 했다. 약 세 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이홍광 부대의 동흥전투는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만주에서 발간된 대동보(大同報)등의 신문에 며칠간 대서특필돼 국내외에 상당한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홍광은 18세 미녀장군으로 오인하게 해 동아일보 등에서는 “이홍광은 약관의 여비적”이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영웅의 장렬한 죽음

동흥읍 진격 작전 성공은 금성철벽을 자랑하던 일제의 국경수비대를 무너뜨리며 일본 불패의 신화를 깨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후 일제군경이 집요하게 이홍광 부대 등 동북인민혁명군 1군을 집중토벌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홍광 부대는 1935년 3월15일 유하현 타요령에서 적의 열차대를 습격하고 통화현 팔구경찰서 관내로 가던 수송차량을 습격해 양곡 80석과 말 20여필을 노획하고 만주국 호송경관 15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뒀다. 그해 5월11일 본계·환인 등지에서 기병대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1사 부대원 200여명을 이끌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재소를 습격해 80여필의 말을 노획했다. 그 말을 몰고 신빈현과 환인현의 경계지점인 노령을 지나다가 200여명의 일만군 연합부대와 뜻밖에 조우했다. 이 전투를 지휘하며 용전하다가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는 동지들에 의해 다음날 해청화락에 있는 밀영으로 후송돼 부대원들의 간호를 받았으나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이홍광의 나이는 불과 만 25세였다.

▲ 노세극 4·16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이홍광은 남만주에서 유격대의 토대를 닦았고 진두지휘했으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는 점,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해 우리 민족에게 독립운동이 살아있음을 보여 줬다는 점, 조중 연합부대의 핵심적 위치에서 항일연합전선을 이끌었다는 점 등 그의 위상은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신빈현 홍묘자향에 있는 그의 무덤이 아무도 찾지 않는 가운데 쓸쓸하게 방치돼 있다고 한다. 그의 묘소를 단장하고 참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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