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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연중기획-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⑤] 석주 이상룡, 혁신유림을 넘어 민주공화국 초대 국무령 되다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 독립기념관

계몽운동에 참여한 혁신유림

한국 독립운동사를 살펴보면 집안 전체가 항일투쟁에 참여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5명의 독립운동 서훈자를 배출한 안중근 집안, 6형제가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회영 집안, 좌우에 뛰어난 독립운동 명장을 배출한 왕산 허위 집안, 대소가에서 20여명의 독립운동 서훈자를 낸 김대락·김동삼 집안, 11명의 독립운동 서훈자를 배출한 조소앙 집안 등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집안 또한 독립운동의 명문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상룡이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 문제를 거론해 언론의 관심을 끌기 전까지만 해도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룡은 오랫동안 안동지역에서 유학 전통을 이어온 명문유림 출신이다. 이상룡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의병운동에 관여했으나, 의병투쟁의 한계를 절감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1908년 말 그는 대한협회 안동지회 조직에 나섰고, 강연회를 열어 과학문명 도입과 신민이 주체가 되는 공화주의를 주장했다. 전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안동에서 이런 주장을 편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서간도 망명과 독립군 기지 건설

이상룡은 국권을 빼앗기자 김대락(이상룡의 처남)·김동삼 등의 안동에 살고 있던 의성 김씨, 왕산 허위 집안 사람들과 함께 일가족을 이끌고 망명한다. 이상룡은 1911년 1월4일 마을 잔치를 열고 5일 동생 봉희와 함께 사당에 참배한 다음, 두 당숙과 두 조카에게 제수용 전답문서를 주고 얼마간의 돈을 나눠 줬으며,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기고 석양에 떠났다.

이상룡 일행은 안동에서 예천·상주를 거쳐 김천까지 250리를 걸었다. 김천서 의주까지는 기차를 타고 갔고, 의주서부터 다시 도보로 신의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발상지인 혼강 일대의 회인현(지금의 환인현) 항도촌에 도착했다. 환인현에는 밀양에서 망명한 윤세복 형제들이 정착, 동창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있었고, 박은식·신채호·이극로 등이 망명해 교편을 잡고 있었다.

1911년 4월 이상룡이 이끄는 망명가족들은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했다. 이때 이상룡의 나이 53세였다. 이상룡은 그곳에서 이회영을 비롯한 신간회 출신 망명인사들과 함께 경학사(후에 부민단)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개설, 독립군을 양성하며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기반을 닦았다.

독립운동 기지를 만드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먹고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인 지주의 땅을 빌리거나 산지·황무지 등을 새로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첫해부터 쌀농사는 흉작이었다. 안동에 있던 토지와 종가(임청각), 그리고 선산까지 처분해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써야 했다.

이상룡의 사상적 발전과 통의부 조직

1919년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만주일대에서도 독립운동이 크게 발전했다. 이상룡 등은 부민단을 확대 개편해 한족회를 조직하고, 군무기관으로 서로군정서를 조직했다. 일종의 군사정부인 서로군정서의 독판은 이상룡, 부독판은 여준이었다. 산하에 2개 연대 규모의 무력이 편성됐는데,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정 지지를 선언했다.

이 무렵 이상룡은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고, 러시아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평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통유림으로 시작한 이상룡은 혁신유림으로 나아갔고, 계몽운동과 공화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사회주의 같은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실로 혁명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3·1 운동과 봉오동·청산리 승전으로 독립군의 기세가 거세게 타올랐다. 그러나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 운동이 침체하고 무장단체들이 난립하며 갈등이 심해졌다. 이상룡은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군사력 통합에 나섰고 1922년 대한통의부를 결성했다. 1923년 일부가 떨어져 나가 참의부가 조직됐다. 이상룡은 다시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나섰고 1924년 정의부를 조직했다. 그러나 북만주 일대에서 신민부가 조직되면서 1920년대 중후반 만주는 신민부·정의부·참의부의 3부 시대가 경쟁·정립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취임과 좌절

1919년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노선 갈등(외교론·무장투쟁론·준비론 등), 지역 갈등(서북파·기호파·삼남파 등), 국무총리 이동휘의 러시아 지원자금 전용 사건,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론 파문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고, 끝내는 창조파·개조파·고수파 등으로 갈라져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1925년 3월23일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이 활로를 모색했다. 2대 대통령 박은식을 중심으로 국무령을 수반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국무령제)로 조직을 개편하고, 초대 국무령에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인물 이상룡을 선출했다.

이상룡의 국무령 선출은 본인에게 사전논의도 없이 이뤄졌지만, 이상룡은 지리멸렬한 임시정부를 바로잡아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삼겠다는 충정에서 국무령에 취임해 상해로 갔다. 그는 이탁·김동삼·오동진·이유필·윤세용·현천묵·윤병용·김좌진·조성환 등 남북 만주 3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요인물들을 대거 국무위원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상해로 부임하지 않았고 임시정부는 다시 갈등에 빠져들었다. 이상룡은 북경으로 거처를 옮겼고, 다음해 국무령에서 해임되자 재차 만주로 돌아갔다.

투지를 잃지 말고 끝까지 싸워라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만주에 남아서 일제와 투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 관내로 활동무대를 옮길 것인가.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이상룡의 가까운 동지 이장녕과 여준이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이상룡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 속에서 곡기를 끊었고, 1932년 6월15일(양력) 길림성 서란현 소고전자에서 눈을 감았다.

74세의 노인 이상룡은 임종에 앞서 평생을 따르던 이진산과 아들·손자 등 가족 앞에서 이렇게 유언했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가서는 안 되니, 우선 이곳에 묻어두고서 기다리도록 하라.” ‘자주적 기상이 유난히 강했던’ 석주 이상룡은 임종을 앞두고 아들 이준형에게 “내가 항상 중국복을 입고 있는 것은 그 중국에 동정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 좋아서 입은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그런 것에 의기소침하지 말고 투지를 키워 더욱 잘 싸워 달라”고 당부했다.

이상룡의 임종 후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손자며느리 허은 등 가족들은 그의 유해를 국내로 운구하려 했으나 돌아올 수 없었다. 이상룡의 유해는 1990년 9월 당숙 이승화, 동생 봉희, 조카 광민 등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옮겨와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가 서울 국립현충원 임정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됐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은 망명객 집안의 역정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남겼다. 허은 또한 독립운동 명문가인 왕산 허위 집안 사람으로 혁명시인 이육사의 외사촌 누이로,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을 역임한 허형식은 그의 당숙이다. 그녀는 1997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오랫동안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하다가 2018년 8월15일 비로소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

석주 일가는 이상룡을 비롯해 동생 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광민, 손자 이병화, 손자며느리 허은 등 모두 10명의 독립운동 서훈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석주 일가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친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선열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나라가 돼야 한다.

임영태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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