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영 선생(1855~1934년).<국가보훈처>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일제강점기에는 빼앗긴 나라를 찾는 독립운동이 최고의 헌신이었다. 외세의 간섭과 민족분단이 계속되는 지금은 무엇이 최고의 헌신일까? 일제에 국권이 넘어가던 구한말에는 명문 귀족이고 거대 지주라 할지라도 독립 성전에 물질적·정신적·육체적 희생을 아끼지 않은 집안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 이석영 형제가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자신과 전 재산을 독립운동의 불쏘시개로 바친 이석영이 없었더라면, 그의 동생 이회영-이시영, 그의 아들과 조카들의 독립투쟁도 없었고 수많은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양성·배출·투신도 어려웠을 것이다.

양자로 들어가 한양 3대 갑부 상속받아

이석영(李石榮, 1855~1934년)은 조선 말기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과 어머니 동래 정씨 사이에서 첫째 건영에 이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셋째 철영, 넷째 회영, 다섯째 시영, 배다른 동생인 여섯째 소영(일찍 사망), 일곱째 호영이라는 남동생들이 있었다. 여동생도 둘이다. 김대중 정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5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현재 민화협 상임대표회장을 맡은 이종걸은 이회영의 손자다.

그런데 당시 온건 개화파로서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후사가 끊기자 가문인 이유승의 둘째 아들 이석영을 양자로 점찍었다. 이석영이 가장 신중하고 원만한 성품이고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하는 균형자라서 이유승은 처음에 반대했다. 이유원이 상소까지 올리고 고종의 비답을 받아 집요하게 요구하니 결국 1885년 나이 서른의 이석영이 양자로 들어가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게 된다. 현재 남양주·파주·개성·충주·한양 등지에 땅과 집이 그의 소유가 된 배경이다.

그해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도 올랐다. 춘추관 별검춘추, 선전관, 이조참의 등을 거쳐 1888년 이유원의 별세로 3년상을 치른 후 형조참의, 승지의 직책을 맡았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후의 일이다. 이유원·김홍집 등 온건 개화파가 민비 계열의 수구파, 대원군의 쇄국파·위정척사파와 대립하고 김옥균·박영효 등 젊은 급진개화파와 갈등하는 모습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1895년 갑오개혁 당시부터 관직과 칩거를 거듭하던 이석영은 1904년 만 49세에 더는 출사하지 않았다.

물려받은 이유원의 별장, 홍엽정(紅葉亭, 현재 회현동 일신교회 자리)은 당연히 개화와 구국의 뜻에 공명하는 지사들의 만남과 토론의 장이 됐다. 가장 신뢰하는 동생 이회영이 불러 모은 이상설·여준·이동녕·이강연 등이 이곳 남산자락에서 국민계몽과 동지 규합, 국내외 정세를 토론한 것이다. 홍엽정은 중등 광성실업학교의 임시교사로 제공된 바 있고 양잠전매사업체 향연합자회사 사무실로도 활용됐다. 교육과 산업의 거점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벼슬길 중단하고 교육과 산업으로

1905년 11월17일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됐다. 이때 강력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 홍엽정 인근 남대문시장 안 상동교회 청년회가 있었다. 당시 상동교회는 이회영이 남대문 상동청년학원 학감, 전덕기·김진호·이용태·이동녕이 교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의 비밀회합 장소가 됐다. 이동휘·이준·이상설·신채호·노백린·양기탁 등 조선 팔도의 주요 인사들이 모였다. 이들이 주축이 돼 1907년 초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추진했고 1896~1898년 독립협회 해산 후 구한말 최대 규모의 애국계몽 구국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게 된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사권마저 빼앗겨 군대가 해산당하고 헤이그밀사사건 이후 고종이 강제 폐위돼 사실상 국권이 완전히 상실됐다. 의병운동이 도처에서 다시 벌어졌으나 일제의 폭압으로 약화되고 신민회를 중심으로 일제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국외 독립운동 기지 마련과 군관학교 설치를 결의했다. 이에 따라 1910년 7월 초 이회영이 이동녕·장유순·이관직 등과 종이장수로 변장해 서간도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그해 8월22일 불법 조인돼 8월29일 발효된 한일병탄 직후 이석영 6형제가 모여 앉았다.

“우리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돼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만일 뒷날에 행운이 있어 왜적을 부숴 멸망시키고 조국을 다시 찾으면 이것이 대한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공(이항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는 이회영의 제안에 따라 온 집안의 중국 망명을 비장하게 결단했다. 이석영은 이미 1910년 6월 초 현재 남양주 일대의 대규모 토지를 매각한 사실로 볼 때, 이전부터 중국 망명을 준비해 왔고 이회영의 서간도 답사 결과와 한일병탄의 정세를 종합해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다.

대의에 따라 죽을지언정…

1910년 12월30일 이석영 6형제와 가족, 해방시킨 노비까지 약 60명이 압록강을 향해 한양을 떠나기까지 만여 석의 재산과 가옥을 방매했다. 그때 돈으로 40만원, 당시 한일·한성·천일 등 3개 시중은행 설립 자본금 총액이 36만5천원이었으니 이석영의 결심으로 현재 시가 2조원 이상 거액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자금이 확보된 것이다. 지금의 명동 입구에 있던 이유승 저택과 이석영이 상속받은 8천평 규모의 명동 땅은 일제의 감시로 팔지 못한 채 이듬해 조선총독부에 강탈당하고 말았다.

6형제 가족들은 경성역에서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가서 새벽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썰매로 건너 안동현(지금의 단동시)에 도착했다. 1911년 1월9일 마차로 안동현에서 8일간 500리 길을 달려 횡도촌으로, 다시 600리 떨어진 유화현 삼원보 추가가로 이동했다. 이회영이 서간도 답사 때 물색해 놓은 곳이고 을미사변 이후 의병을 일으켰던 의암 유인석이 망명 왔던 지역이다. 이석영 6형제가 정착한 지 한 달쯤 뒤 안동의 이상룡과 김대락·김동삼 등 영남 명문 가족도 도착했다.

추가가(추씨의 마을)에 조선인들이 밀려드니 유화현에 고발해 땅 매입을 막았다. 그래서 이회영은 이석영의 서신을 들고 북경의 원세개를 만나 협조를 부탁해 삼원보 추가가 정착을 해결했다. 양부 이유원과 이석영의 원세개 전 조선주둔군 사령관과의 관계가 통한 셈이다. 경술국치 이후 만주에 조선인 이주자는 꾸준히 늘어나 만주족을 압도할 정도가 됐다.

경학사-신흥무관학교 설립

1911년 4월 추가가 인근 대고산에서 조선인 이주자들 300여명이 참석한 군중대회가 개최됐다. 임시의장에 이동녕을 선출하고 경학사 조직, 질서 확립, 모두 농사짓기, 학교 설립, 군관 훈련 등 5개 항의 결의문이 채택됐다. 그해 5월 경학사는 이석영의 바로 아래 동생 이철영이 사장, 이상룡이 부사장을 맡다가 이듬해 이상룡을 회장으로 하는 부민단으로 확대 재편돼 서간도 일대, 수십 만명의 조선인 이주민들의 자치행정기관으로 발전했다.

그해 6월10일 옥수수 창고를 개조해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진다. 이 학교 설립 자금의 대부분을 이석영이 충당했고 초대 교장은 이상룡, 나중에 이철영이 맡았다. 신흥강습소는 4년제 중학 과정과 3개월·6개월·1년 등 단기 코스의 군사학 속성반으로 운영됐다. 전액 무료 교육기관이었는데, 그 비용도 이석영 형제가 마련해 온 자금으로 충당했다. 학생들이 계속 늘어나 학교를 확대 이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석영은 통화현 합니하에 토지를 사들이고 학생·교사·주민들의 학교 짓는 공사를 벌였다.

바로 이 학교에서 김산·김원봉·오성륜 들의 열혈 독립투사들과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을 이끈 주역들을 배출했던 것이다. 이석영 6형제의 자식들만이 아니라 따라온 해방 노비들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웠다. 나중에 독립군이 된 홍흥순이 그중 한 사람이다. 한때 대갓집 마나님들도 식구들만이 아니라 기숙생들의 끼니까지 챙기는 밥하고 빨래하는 노동에 동참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무장부대에 들어가 독립군이 되거나 만주 각지의 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동명·동광·흥동·배달·여명 학교 등 신설되는 인근 학교 설립도 이석영의 후원에 힘입었다.

청산리대첩의 주역들 배출

1919년 3·1 만세시위는 조선인 이주민들이 사는 만주 도처에서도 벌어졌다. 삼원보의 3월14일 대규모 만세운동에는 신흥무관학교 학생·교사·주민들이 함께 참여했다. 비폭력 무저항 노선의 3·1 만세시위가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으로 실패하자 조선 청년들은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신흥무관학교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다시 유하현 고산자 하동대두자로 옮겨 본교를 세우고 합니하 분교를 운영했다. 1919년 6월 확장 이전된 신흥무관학교는 정식명칭으로 개교식을 거행했는데, 이청천·김경천·이범석 등이 교사로 참석했다.

그러나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참패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경신 대참변을 일으키고 조선인이 거주하는 골마다 대규모 학살 만행을 자행했다. 그해 10월9일부터 11월5일까지 3천469명의 조선인을 죽였다. 독립군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도 1920년 말 일제의 압력과 이에 굴복한 중국 관헌의 요구로 폐쇄당했다. 이제 이석영도 가진 모든 돈을 소진하고 사실상 무일푼의 처지에 놓였다. 나이도 환갑을 넘었고 몸은 병들었다.

이회영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노선 차이로 결별하고 북경에서 신채호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 독립투쟁에 전념했다. 1932년 66세 나이에도 남만주 조선혁명군과 연계해 무장투쟁을 벌이겠다고 대련 항구에 도착했으나 밀고로 체포됐고 수상경찰서 지하 조사실에서 고문치사를 당했다. 이시영은 상해 임시정부에 끝까지 남아 해방 이후 김구와 함께 귀국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6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해방 이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이다.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이석영은 봉천으로 이사하고 1922~1923년께 천진을 거쳐 북경에서 이회영과 같이 살기도 했다, 막냇동생 이호영이 병든 형 이석영을 모시고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탈출한 뒤 상해 빈민가에서 살다가 1934년 2월 쓸쓸히 운명했다. 부인 박씨도 조카 집에 얹혀살다가 2년 후에 숨졌다. 이석영의 큰아들 규준은 다물단의 핵심성원으로 밀정 처단의 소임을 맡고 활동하던 중 1928년 석가장에서 병사했다. 작은아들 규서는 삼촌 이회영의 대련행을 밀고해 백정기에게 처단되는 상처를 남겼다. 집안의 대가 끊겼지만, ‘사회지도층 책임의식’에 대한 이석영의 모범은 온겨레의 가슴 속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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