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안희제 선생(1885~1943). <한국학중앙연구원>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국권을 상실한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겠다고 나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의 고매한 품성, 높은 도덕성, 불굴의 의지와 치열한 투혼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백산 안희제 선생도 그런 분이다. 그러나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그는 한평생 기업인, 즉 사업가로서 살았다. 그는 시종 경제사업에 관계하며 살았기 때문에 사업가로서 얼마든지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일으킨 사업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거나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역할을 했다. 한평생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와 타협을 할 줄 모르는 독립투사로서 살았으며 백범 김구, 백야 김좌진과 더불어 삼백으로 불리던 백산 안희제. 일제강점기와 달리 기업가나 사업가들이 널려 있는 현시대에 진정한 기업인 또는 사업가는 어떠해야 하는지 백산 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 반추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안희제는 누구인가

“국가가 망했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고서를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서울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해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가히 공맹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산림 간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1905년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한 안희제는 유학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부친과 조부한테 위와 같은 말을 하며 서울로 떠났다.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와 보성전문학교 그리고 양정의숙을 두루 거치면서 공부했다. 그가 이렇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부유한 가정환경 덕택이었다. 그는 1885년 경남 의령의 설뫼마을에서 천석지기 양반가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집안의 어른들에게 한학을 배웠다. 17세에 의령군에서 실시한 백일장에 한시를 써서 상을 받기도 하는 등 뛰어난 모습을 보였으나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신학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교남교육회·대동청년단 가입 독립운동 시작

양정의숙에 다니던 1907년과 1908년 구국계몽운동 일환으로 영남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돼 조직한 교남학우회와 교남교육회에 참가해 활동했다.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해야 함을 깨닫고 실천에 들어가 고향인 의령에서는 의신학교·창남학교를, 동래에서는 구명학교를 설립했다. 구명학교에서는 1909년부터 2년간 교장 겸 교사로 재임하며 학교를 운영했다. 1909년 10월에는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고 초대 부단장이 됐다가 이후 2대 단장이 됐다.

대동청년단은 17세부터 30세까지 청년들이 중심이 된 조직으로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조직의 면모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동청년단의 단규를 보면 ① 단원은 반드시 피로 맹세할 것 ② 새단원의 가입은 단원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을 것 ③ 단명이나 단에 관한 사항은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④ 경찰, 기타 기관에 체포될 경우 그 사건은 본인에만 한하고 다른 단원에게 연루시키지 말 것 등이다. 단원들로는 임시정부 초대 법무차장과 재무차장을 한 남형우·윤현진을 비롯해 서상일·신채호·신백우·김동삼 등이 있었다. 1911년에는 대종교에 입문했다. 대동청년단은 조직과 활동 면에서, 대종교는 사상적 측면에서 일생토록 영향을 미쳤다.

백산상회 설립, 독립운동자금을 대다

그는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1911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안창호·이갑·신채호 등 인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했으며 <독립순보>를 발행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큰 자극을 받았으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귀국했다. 이 기간은 그의 첫 번째 망명기간이었는데 국제정세를 살펴보고 자신만의 사업전략을 수립한 시간이 됐다. 국내로 들어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한 결과 논 2천마지기를 처분해 이를 자금원으로 하여 부산에 자신의 호를 따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지사들이 경제적으로 너무 곤궁하게 살며 자금난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이 절실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를 돕기 위해 사업을 해서 자금을 대어 주고자 했던 것이다.

백산상회는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개인회사로 출발했지만 1919년에는 자본금 100만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전했다. 안희제는 2천560주를 소유한 최대주주였지만 사장으로는 경주 출신의 대지주였던 최준을 앉히고 자신은 실질적인 경영보다는 국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데 진력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서울·대구·인천·원산 등 국내 열여덟 곳과 안동·봉천·길림 등 국외 세 곳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했다. 이는 영업활동 지역의 확대라는 측면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위한 정보연락과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재정적 기지이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연통제를 실시했는데 백산상회는 아일랜드 출신 영국인이었던 조지 루이스 쇼가 경영한 중국 안동(현재 단동)의 이륭양행과 더불어 2대 거점이었으며 독립신문 보급통로였다. 백산무역이 부산의 최대 회사로 발돋움하고 민족기업으로 발전해 가자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됐으나 독립운동 자금 전달 방식을 장부상 거래 형식으로 했기 때문에 일경에 적발되지 않을 수 있었다. 1919년 1월 파리평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기로 했는데 이에 대한 경비가 없자 장덕수를 통해 당시로는 거금인 3천원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회사의 경영성과와 상관없이 독립운동자금을 지속적으로 전달하다 보니 회사는 만년 적자를 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내부 임원 간의 갈등도 있어서 결국 1928년 1월 해산하게 됐다.

협동조합운동 전개, 중외일보 사장

1919년 3·1 운동 시기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남일대에 배포하는 역할을 했으며 백산상회 외에 경남인쇄주식회사(1916), 조선주조주식회사(1919) 등 기업을 설립하며 제조업에도 진출했다. 기미육영회를 조직해 청년들 중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해 국외 유학을 보내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민족자본가로서 노동운동을 지원했는데 1921년 부산부두노동자총파업 투쟁의 승리 뒤에는 그의 보이지 않은 후원이 있었다. 그는 전투적 민족주의자로서 독립전쟁의 방략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근로대중과의 결합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협동조합운동에도 참여해 1928년에는 부산협동조합을 창립했으며 서울에서 설립된 협동조합경리조합의 이사장직에 오랐다. 협동조합운동사의 기관지인 월간지 <자력>을 발간하기도 했다. 1919년 9월에는 <중외일보>를 인수해 언론운동에 종사했다

발해농장 경영

1926년 9월부터 12월까지 그는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동만주 일대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1932년 목단강 상류인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일대 토지를 사들이고 이듬해 이주해 드넓은 땅을 개간해 농지를 조성하고 농민 300여호를 이주하게 했다. 동경성은 발해의 고도였기 때문에 발해농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또 마을에 발해보통학교를 세워 스스로 교장으로 일했다. 발해농장을 통해 민중경제에 기초한 민중자치의 이상촌을 만들고자 했다. 발해농장은 그가 일생 동안 해 온 교육운동·기업운동·협동조합운동을 총합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가 이미 일본 수중에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의 의지가 관철되기는 어려웠다. 1942년 11월19일 신병치료차 고향에서 요양 중 체포됐다. 만주 목단강 경무청에 수감돼 갖은 고문을 당했다. 1943년 9월2일 약 9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3시간 만에 순국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체포되기 전에 일기와 각종 자료들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그의 체포는 대종교 탄압의 일환이었으며 대종교에서는 그와 함께 체포돼 순국한 열 분을 임오십현으로 기리고 있다.

▲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백산의 자취가 남아 있는 부산에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해 백산상회가 있던 자리에 백산기념관을 세웠다. 부산의 시민단체들은 부산의 대표적인 공원인 중구 광복동의 용두산공원을 백산 안희제 선생 기념공원으로 바꾸자고 제안하고 있다. 1976년에 경남 의령군에서 그의 뜻을 기리고자 추모비를 세웠다.

오늘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업인들이 있지만 백산 안희제 같은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오늘 그의 자주·자력·자강 정신, 협동·연대에 대한 사상과 실천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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