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16일이면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76조의2) 시행 5년이다. 편 가르고 따돌리고 뒤에서 수군대던 행위들이 비로소 괴롭힘이라는 이름으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저 아랫사람이란 이유로, 나만 예민한가 싶어서 숨죽여 참았던 행위에도 빨간 딱지가 붙었다.

그렇게 5년, 이대로 좋을까. 직장의 테두리를 묻고 지시의 정당성을 묻고 이것도 괴롭힘이냐 묻는 목소리도 묻어난다. <매일노동뉴스>는 시행 5년을 맞은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의 현재와 미래를 들어봤다.

<기획취재팀=제정남·이재·강예슬 기자>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수도권 한 대학 연구소 계약직 교수인 ㄱ씨는 부당해고를 당했다가 노동위원회 판정으로 복직했다. 그런데 복직한 직후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던 조교들로부터 직장내 괴롭힘 신고를 당했다. 방문을 제대로 노크하지 않았다는 등 이유는 다양했다. 직장내 괴롭힘 신고에 따라 연구소는 ㄱ씨를 대기발령했고 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결과가 나오지 않은 채 대기발령 기간만 길어졌다. 징계를 받지 않았으니 노동위 구제신청도 불가능했다. 대기발령이 장기화해도 직장내 괴롭힘에 대한 피해자 보호 조치라 대응할 게 많지 않다. ㄱ씨는 모함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시간만 흐르면 계약기간 만료로 또다시 해고당할 위기다.

근로기준법 76조의3 “피신고인 방어권이 없다”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76조의2) 시행 5년이 지나면서 제도 취지와 맞지 않는 직장내 괴롭힘 오·남용 사례가 일부 확인되고 있다. 전문가 의견은 엇갈리는 모양새다. 일각에서는 현실에 존재하는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제도 안착 과정의 문제를 침소봉대한다고 경계한다.

23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실제 사건을 마주하는 법조인들은 대체로 직장내 괴롭힘 신고 오·남용 문제에 공감했다. 김동민 공인노무사(노무법인 문명)는 “최근 기업가에서 저성과자를 정리(해고)할 때 가장 좋은 수단이 직장내 괴롭힘이라는 말이 돈다”며 “직장내 괴롭힘 피해를 예방·근절하기 위한 목적의 제도지만 사용자가 목적을 갖고 제도를 악용하면 피신고인이 대처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오·남용 문제를 무겁게 보는 쪽은 현행 법리가 신고인에 쏠려 있는 게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직장내 괴롭힘을 금지한 근로기준법 76조의2가 아니라 직장내 괴롭힘 발생시 조치를 담은 76조의3의 문제다.

이 조항에 따르면 사용자는 피해근로자의 의사에 반하는 조치를 해선 안 되고, 피해근로자의 요청에 따른 적절한 보호조치 의무도 있다. 직장내 괴롭힘 행위자(가해자)에 대한 징계에도 피해근로자의 의견청취 의무가 부여된다.

피해자 보호 의무가 강조되면서 가해자의 방어권이 침해된 사정은 종종 가벼이 취급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현장에서는 더욱 피신고인의 방어권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조상욱 변호사(법무법인 율촌)는 “피신고인 징계를 위한 인사위원회를 구성할 때 하루 전 통보하거나 징계 사유를 명확히 전달하지 않고 징계를 의결하더라도 징계가 타당하다는 하급심 판결들이 나온다”며 “방어권이 형성돼 있다면 제대로 변론할 수 없는 사정이 참작돼 징계의결이 불가능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는 “취지상 잘못된 것은 아니나 피신고인에 대한 절차 등에는 입을 닫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직장내 성희롱 ‘공통기준’ 정착의 경험

반면 오·남용 문제에 천착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승협 대구대 교수(사회학)는 “오·남용이라고 말하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직장내 괴롭힘의 본질은 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갑질”이라며 “오·남용 사례를 부각하기보다 직장내 괴롭힘의 본질인 위세와 권력을 갖고 자행되는 따돌림과 갑질 같은 문제를 예방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비교대상은 직장내 성희롱이다. 이준희 광운대 교수(법학)는 “과거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을 통해 직장내 성희롱을 법률로 규제하던 초창기에도 오·남용 관련 지적과 비방이 많았지만 사회적으로 성인지 감수성이 성희롱에 대한 공통의 기준을 형성하면서 이제는 불필요한 논란이 사라졌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이 5년밖에 지나지 않아 이로 인한 부작용이 크게 보일 수 있지만 제도를 새로 도입하면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지금 근로기준법을 다시 수정할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오히려 근로기준법 개정보다 더 넓은 사회적 맥락의 괴롭힘 근절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를테면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인종·종교·나이·성적지향·국적 등 다양한 맥락에서 발생하는 차별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직장내 괴롭힘의 원인을 개인 간 갈등이 아닌 집단적 맥락에서 찾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승협 교수는 “해외에서의 직장내 괴롭힘 연구는 학교공간에서의 괴롭힘 인식에서 출발해 기업과 사회적 맥락으로 확대됐다”며 “집단적인 문화가 개인에게 차별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괴롭힘인데, 현재는 지나치게 개인 간 행위에 초점을 맞춰 조직문화가 왜 괴롭힘 행위를 형성하게 됐는지에 대한 고려가 배제된다”고 지적했다.

정기훈 기자
▲정기훈 기자

 

가해자 될까, 업무지시 못하는 중간관리자들

다만 오·남용 문제에 대한 이해가 다르더라도 직장내 괴롭힘 신고로 인해 사업장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현실적인 문제는 남는다. 김명진 공인노무사(노무법인 해원)는 “업무와 관련돼 적정범위를 초과했는지가 직장내 괴롭힘 행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중간관리자는 업무 처리에 애를 먹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며 “하급자에게 업무를 지시했다가 직장내 괴롭힘으로 몰릴까봐 직접 수행하는 중간관리자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김 노무사는 “교육 등에서 이런 중간관리자들을 만나면 업무를 넘기는 것을 꺼려 하면서 정신과 상담을 받는 피해사례도 있다”고 덧붙였다.

개인마다 직장내 괴롭힘 행위 기준이 상이한 대목도 지속된 논란이다. 생일축하를 신고인에게만 해 주지 않아 직장내 괴롭힘으로 신고한 사례도 있다. 김동민 노무사는 “해당 사업장의 맥락 안에서는 괴롭힘과 따돌림의 고통이 수반되지만 노동청 진정 등으로 외부화됐을 때 근로감독관에게 설명하기 군색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사회적 비용 낭비를 막기 위해 행위 기준과 기간을 정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접수된 모든 직장내 괴롭힘 신고에 대해 조치해야 하는 지금 제도에서는 그만큼 인력·시간·자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집단지성으로 본 괴롭힘 행위의 판단기준은 주 1회 이상의 반복성, 1~3개월 이상의 지속성”이라며 “이는 해외에서 수십년 관련 연구를 한 전문가들 판단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서 연구위원은 “괴롭힘에 대한 판단은 상식의 영역이며, 그 상식은 근로자 집단의 상식이어야 한다”며 “근로자들 스스로가 이렇게 판단하는데 더 말할 게 있냐”고 반문했다.

이런 주장은 직장내 괴롭힘 피해자의 고통을 계량화할 수 없다는 반박으로 이어진다. 실무 위주의 개념정의에 편중됐다는 지적이다. 이승협 교수는 “법적인 괴롭힘의 개념이 모호해 실무에서 행위형태와 기간 등을 두고 다투는 게 현실”이라며 “이를 명확히 하려고 법령에 행위와 기간을 명시하는 방식은 결국 또다시 ‘이 밖의 기타 행위’ 같은 애매한 조항을 포함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성급하게 행위와 기간을 정하기보다 5년간 축적된 직장내 괴롭힘 사건들을 유형별로 분류·분석해 판단 기준을 도출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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