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3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에는 많은 여성이 참가했는데, 분단된 이 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 항일유격대 여전사들 중에서 무거운 기관총을 가벼운 소총 다루듯이 휘두르며 일제를 무리로 쓸어 눕혔던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1로군 2군 4사 1퇀 1련의 첫 여성 기관총 사수인 허성숙이다.
야학에서 항일혁명의식 함양
허성숙(1915~1939)은 연길현 차조구 중평촌(지금의 안도현)의 어느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소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산나물을 캐고 땔나무를 하며 가사노동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남자들 못지않게 힘이 셌고 유달리 성격이 활달했으며 인정이 많았다.
그는 12~13세 되던 1927~1928년께 마을 야학에 다니면서 민족자주의식을 싹틔웠다. 1926년 5월 설립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1928년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의해 해체됐지만, 당시 선각자들이 동만지역 도처에 야학을 운영할 때였다. 그는 매일 야학에 가장 일찍 출석해 수업에 몰입했다고 한다.
1930년 이른바 5·1 폭동, 5·30 간도폭동, 8·1 길돈폭동이 용정을 중심으로 동만 일대, 길림-돈화 철길 주변지대를 휩쓸었다. 당시 국제당에 틀고 앉은 중국공산당의 이립삼 좌경모험주의 노선에 더해 1국 1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높은 점수로 가입하려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출신들의 탐욕이 항일 의지로 가득 찬 조선인들을 무모한 폭동으로 내몰았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구속자를 내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자초했다.
그럼에도 15세의 중평촌 허성숙은 많은 조선인 청년들처럼 이 ‘붉은 5월 투쟁’의 불길 속에서 소년선봉대에 가입해 항일혁명에 투신했다. 1931년 9·18 사변으로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18세 때인 1933년 청년단에 들어가 더욱 열심히 활동했다. 그해 연길유격대 여전사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소년선봉대-청년단-유격대
그 시기에 허성숙의 아버지 허기영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 자위단 단장을 맡았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위단장 모자를 벗으라고 했지만 완고한 아버지는 딸의 애원을 매번 마이동풍으로 대했다. 결국 자위단장 아버지와 의절을 하고 삼도만 유격구에 찾아 들어갔다가 항일유격대에 입대한 것이다.
곧이어 일제의 ‘동계토벌’이 시작됐다. 일제 관동군과 위만주군은 항일유격대를 없애려고 3천여명의 대병력을 동원해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항일유격대는 14일간의 처절한 전투로 물리쳤다. 허성숙은 이 반토벌 전투에서 남달리 용감하고 단호하게 돌격하면서 적을 무찔렀다. 또 행군 도중에 부상자를 돌보고 숙영지에서 옷을 빨아 깁고 취사를 도왔다.
1934년 7월 허성숙이 속한 동북인민혁명군(이후 동북항일연군) 독립 1퇀 1련이 고향 마을 중평촌 부근의 한 골짜기에서 아버지 허기영이 인솔하는 자위단과 조우해 일촉즉발의 대치상태에 놓였는데, 허성숙은 이렇게 외쳤다.
“아버지! 딸 성숙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제를 때려 엎고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싸우는 대오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서로 싸워야 합니까? 아버지! 총부리를 돌리십시오. 딸 성숙이와 함께 성스러운 반일투쟁에 참가합시다.”
“아버지! 총부리를 돌리십시오”
그러나 허기영의 멱따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자위단이 단장 허기영의 지휘하에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동북인민혁명군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돌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쏜살같이 적진으로 들어가 적을 무찔렀다.
또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허성숙이 유격대원들과 함께 식량을 구해 돌아오는 중에 토벌대와 마주쳤다. 다른 대원들을 나무숲에 숨기고 자신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전봇대에 올라갔다. 5~6명의 토벌대가 접근하자 그는 수류탄을 던져 몰살시켰다. 1934년 겨울, 일제의 죽이고 빼앗고 태우는 삼광(三光)정책으로 민중의 생활도 유격대의 보급도 매우 어려웠을 때 허성숙은 병 치료 중인데도 자기한테 차려진 식량을 가난한 집 아이들한테 보내고 풀뿌리로 연명했다.
지혜와 용기로 칭찬이 자자했던 허성숙은 38식 소총 끝을 한 손으로 잡고 수평으로 올리는 시합에서도 남성 유격대원들을 이겼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1935년 봄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돼 귀대하게 되자 기관총수를 간절하게 지원했다. 지휘부에서 이를 허락하자 밤낮으로 훈련해 그의 기관총 사격기술과 명중능력이 놀랍게 발전했다.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2군은 동북항일연군 2군으로 개편됐고 허성숙이 소속된 1퇀은 4사 1단이 됐다. 현재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룡해의 아버지인 최현이 2군 4사 1단장이었다. 2군은 동만과 남만의 여러 현에서 일제에 된 타격을 안겼다. 4월 화전현 대포차자(현 돈화시) 전투, 8월 무송현성 전투, 10월 안도현 동청구 전투, 11월 임강현 전투 승리에 허성숙의 기관총이 크게 기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항일연군의 이 용맹한 여전사는 193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코앞에 두고 그해 6월 김일성부대(1로군 2군 6사)에 의해 조선 경내 혜산 북방 보천보를 기습당한 일제는 후방 안전을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추격했다. 허성숙은 최현 부대를 따라 장백현 13도구에 진출해 간삼봉에서 일제와 맞붙었다. 그해 6월30일 새벽 2천여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해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기관총을 잡은 허성숙은 최현의 명령이 떨어지자 맹렬한 사격을 가해 적을 무더기로 쓰러뜨렸다.
힘과 지혜, 용기와 사랑을 겸비한 기관총 사수
김일성(2군 6사장) 부대-최현(2군 4사 1단장) 부대의 연합작전으로 일제에 또 한 번의 타격을 가한 간삼봉전투 이후 항일연군 2군 4사는 허성숙에게 ‘여장군’ ‘허장군’이란 영광스러운 별호를 달아 줬다. 허성숙의 용감성과 대담함에 대한 감탄의 표현이었다. 김일성 주석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허성숙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나는 허성숙에게 설사 아버지가 친일분자로 되었다 하더라도 동무는 지금과 같은 립장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을 탓하기 전에 아버지를 혁명의 편으로 돌려세울 생각을 해야지 결별부터 선언하고 원쑤의 편으로 밀어던지면 어떻게 하는가. 자기 아버지 하나를 개조하지 못하는 불효자식이 혁명을 하면 얼마나 잘하겠는가. 머지않아 우리는 녀성중대를 꾸려 보자고 하는데 동무가 아버지에 대한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그 중대에 망라시키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허성숙은 울먹거리면서 자기가 그동안 처신을 잘하지 못했는데 앞으로 기회가 생기면 아버지를 잘 설복하겠으니 녀성중대에만은 꼭 받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녀성중대에 망라되여 잘 싸웠습니다. 그가 싸움을 잘하였기 때문에 전우들은 그를 가리켜 ‘허장군’ 또는 ‘녀장군’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간삼봉전투가 있은 날 저녁 최현을 만나 허성숙에게 얼마 동안 말미를 주어 집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부녀간의 상봉을 마련해서 그들의 관계를 개선하자는 생각에서 그런 권고를 했더니 최현도 얼른 동의해 나섰습니다. 그는 부대가 명월구 부근에 가면 허성숙을 꼭 아버지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성숙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허성숙이 아버지한테 찾아가려고 길 차비를 하고 있을 때 할힌골 격전을 지원하여 대사하, 대장강 전투를 벌리기 위한 작전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허성숙은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는 큰 작전을 앞두고 어찌 사사일부터 먼저 치르겠는가 하면서 집에 가는 일을 뒤로 미루겠다고 제기하였습니다.”
할힌골 격전은 1939년 5월부터 8월까지 몽골과 만주국의 국경지대인 할하강(Khalkha river) 유역에서 일어난 소련군·몽골군과 관동군·만주국군 간 전투다. 허성숙은 대사하·대장강 전투가 벌어지던 날 자기 순번이 아니었으나 늙은 대원을 도와주려고 보초소를 찾아갔는데, 불의에 적 군용자동차 편대와 조우했다. 그는 노 대원을 시켜 지휘부에 정황을 보고하게 하고 혼자 적을 막아 나섰다. 그는 총소리를 내어 자기를 노출하더라도 적의 공격을 몇 초라도 저지하려 했다. 적의 화력이 그에게 집중됐고 여러 발의 총탄을 맞았으나 휴대하던 수류탄을 다 터뜨린 다음에야 눈을 감았다. 친일파 아버지를 설득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안타깝게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1939년 8월23일 그의 나이 24세 때 일이다.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105] 세월에 묻힌 혁명가 김홍선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104] 최능진, 경평축구대회 정례화로 민족 단합을 꾀하다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103] 남북을 넘나든 통일가교 삼대(三代) ②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102] 남북을 넘나든 통일가교 삼대(三代) ①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101] 연해주의 항일 영웅, 백추 김규면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100] ‘조선의 체 게바라’ 박영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99] 제국주의 간섭군과 싸운 연해주 빨치산 대장, 한창걸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109] 민족건양·민족자주국가의 한길, 이종률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110] 1930년대 만주 항일 유격대의 첫 여성중대장 박록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