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길림신문
▲ 길림신문

일제강점기에는 조국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총을 잡은 여성 항일투사들이 많았다. 영화 <암살> 안옥윤 역의 동기가 됐다는 서로군정서 남자현, 독립군의 여걸이라는 만주 정의부 계열 이관린,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린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김명시 등은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여성들이 가장 많이 참여해 조직적이고 비타협적으로 싸운 곳은 1930년대 만주항일무장투쟁이었다. 치료를 돕는 간호원, 취사를 담당하는 작식대, 군복을 짓는 재봉대만이 아니라 전투단위로서 여성중대가 편성됐다. 여성중대는 여성중대장이 지휘했다. 여성대원들은 독자적 유격전까지 벌여 일본군과 위만군을 무찔렀다. 동북인민혁명군 2군 3사(후에 동북항일연군 2군 6사), 즉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김일성부대)의 여성중대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 첫 여성중대장이 박록금이었다.

이불 한 채 없이 결혼하고 포대기 하나 없이 아이 낳아

박록금(1915~1940년)은 1915년 5월3일 함경북도 경성군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으로 이주했다. 1932년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의 왕청유격대 1중대에 남편 강증룡과 함께 참군한 것으로 볼 때 그 이전에 야학·아동단 등의 활동으로 민족적 계급적 각성과 조직적 단련의 기회를 갖지 않았을까 싶다. 나이 17~18세에 결혼하고 구 부녀회 주임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청유격대는 동만 항일유격대 창건 초창기인 1932년 봄 소왕청 최창호네 물레방앗간에서 김철·양성룡 등 12명으로 구성됐다. 머지않아 중대 규모로, 그해 11월 3개 중대를 가진 대대로 발전했다. 1934년 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2군 독립사 왕청3퇀(연대)으로 개편됐다. 박록금이나 강증룡이 모두 찢어지게 가난해 결혼할 때 이불 한 채 마련하지 못했다. 박록금이 소왕청 근거지의 친정집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포대기 하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왕청유격대 정치위원이던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당시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 말(포대기 하나 없이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가 보았더니 정말 이불은 고사하고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홀아비살림에 딸 시중까지 드느라고 쩔쩔매던 박록금의 아버지는 자기네는 난리통에 너무나 여러 번 곤두박질을 하다 보니 이불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까마득하다고 했다. 갓난애기는 헌 누데기(누더기)에 싸여 있었다. 나는 곧 소부대를 파견해 이불과 포단감을 마련했다. 재봉대원들은 밤을 새워 가며 그 천으로 두툼하고 푹신한 이불과 애기포단, 애기옷을 마련해 보내 주었다.”

1934년 5월 이후 박록금의 남편 강증룡은 왕청퇀 7중대 소대장으로서 안도 독립퇀에 소속돼 새로운 안도현 처창즈 근거지를 개척하는 일련의 전투에 참가했다. 일제의 대토벌로 유격대 근거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변화무쌍하게 일제를 타격하고 광활한 지대로 항일혁명의 씨를 뿌리는 유동작전을 개시했다. 박록금은 아이 때문에 부대를 따르지 못하고 왕청에 남게 됐다. 그러나 그는 혁명대오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 어린아이를 친정아버지에게 맡기고 남편이 속한 부대가 김일성 부대에 편입됐다는 소문을 듣고 남편과 부대를 찾아나섰다. 천산만고 끝에 백두산쪽에 새로 조직된 항일연군 2군 3사를 만나서 같이 싸울 수 있게 됐다.

항일 여전사들의 빛나는 전과

1936년 봄 항일연군 2군 3사의 김일성 사령은 무송현 마안산에서 민생단 조작문서 보따리를 불태우고 아무 죄도 없는 그 혐의자들을 받아들여 부대를 빠르게 확대했다. 이해 4월 무송현 만강에 주둔한 위만군부대를 습격해 타격을 가했다.

바로 이 때 만강 부근 수림 속에서 사령부 직속 여성중대가 출범했다. 왕청 땅에서 남편과 부대를 찾아 남만의 무송현 마안산까지 왔던 박록금이 첫 중대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예로부터 전쟁과 전투는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으나 식민지 조선 여성의 이중삼중의 고통을 끝장내기 위해서라도 남성들 못지않는 항일무장투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일련의 전투 성과는 항일 여성전사들의 실력을 보여줬다.

그해 5월 동강의 위만군 병영을 기습해 숱한 적들을 살상하고 전리품들을 노획했다. 3인의 여전사들이 달빛 속에 총을 한 발씩 쏘아 경비전화선을 자르는 등 전투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그 밖에 무송의 소탕하 위만군 기병대 30여명을 쳐부순 전투, 서강의 위만군 40여명 격파, 임강 서남차 위만군 수비대 2명 사살, 16명 포로 습격전투 등에도 여성중대 전공은 혁혁했다. 부대도 늘어나 원래의 7~8연대에 더해 구국군과 산림대를 중심으로 9~10연대가 새로 편성돼 항일연군 1로군 2군 6사로 개편됐다. 그해 8월 다시 만강부락으로 집결해 김일성 장군이 직접 창작한 혁명가극 <피바다>에 박록금 등 여성전사들이 출연해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1936년 9월 박록금과 여성중대 대원들이 참가한 백두산 인근의 첫 총소리가 덕수골 대덕수전투와 소덕수전투에서 울렸다. 적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 후 사령부는 이동학을 책임자로 소부대를 파견해 장백현의 인재 발굴에 진력했다. 1937년 초부터 가을까지 권영벽·김주현·김평·김재수·김정숙·박록금·김정필·마동희·지태환 등 30여명의 정치공작원을 압록강 국경지대와 국내로 파견했다. 박록금은 겉보기에 무뚝뚝한 것 같았지만 속이 깊고 인정미가 있으며 붙임성이 좋아 적임자였다. 박록금은 1937년 초 장백현 20도구 신흥촌으로 갔다.

이미 백두 밀령에서 김일성 장군을 만난 신흥동 촌장 이제순의 집에 거처하며 장백현 당위원회와 조국광복회의 조직화를 뒷받침했다. 특히 여성들을 조국광복회 조직에 묶어 세우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권영벽과 부부로 위장한 황금옥과 함께 피나는 헌신과 노력으로 조선인민혁명군 원호사업이 활성화되고 조국광복회가 장백현 전 지역에 뿌리를 내리며 그 토대 위에 지하당 조직들이 구축됐다. 김일성 장군은 백두 횡산밀영에서 권영벽·김평 등이 참가한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를 소집하고 권영벽을 서기로, 이제순을 부서기로 당 장백현위원회를, 이제순을 책임자로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성공적 국내 진출 작전, 그리고 혜산사건

1937년 3월 무송현 서강에서 동북항일연군 2군 군정간부회의에서 국내 진출 작전방침이 검토됐다. 이에 따라 박록금 소속 2군 6사는 장백현 19도구 지양개에서 새 여름군복을 갈아입고 19도구를 떠나 20도구, 21도구, 22도구를 거쳐 이튿날 구시골 등판에 이르렀다. 다시 압록강을 건넌 뒤 지체 없이 조선 대안의 곤장덕에 이르렀고 그해 6월4일 밤 보천보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국경특설경비대장 오가와가 30여명의 국경경비대로 추격했으나 매복에 걸려 타격을 받았다. 박록금은 김확실 등 여전사들과 함께 보천보전투와 구시산 매복전에 참가해 남전사들 못지않음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백두산 인근에 뿌리 내린 조국광복회와 당 조직, 부대 원호사업에 불안과 공포를 가진 일제는 1937년 10월 그 일대에 무력을 증파하는 동시에 혜산사건을 조작해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그 결과 한 해 동안 피와 땀으로 일군 지하조직들이 거의 파괴되고 권영벽·이제순·박록금 등 수많은 항일혁명가들이 체포·구속됐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2군 6사가 몽강일대로 진출한 뒤의 일이다. 박록금은 체포돼 혜산경찰서를 거쳐 함흥형무소에 이송됐다. 그는 이제순처럼 남들이 한 일까지 자기가 다했다고 진술해 적지 않은 혁명가들을 감옥에서 석방시켰다.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동지들이 감방 안에 쓰러져 있을 때는 혁명가요를 불러 그들의 심장을 두드렸다.

일제는 함흥형무소에서 그를 결핵환자가 있는 감방에 밀어 넣었다. 그 결핵환자는 정평농조사건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김아무개씨였다. 박록금은 일신의 건강을 안중에 두지 않고 중태에 놓여 있는 그 여성을 정성껏 간호했다. 김씨는 얼마 후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대신 박록금이 전염돼 눕게 됐다. 그 여성 가족이 신세를 갚는다고 명주 저고리와 떡을 해서 찾아왔으나 일제는 박록금을 면회실이 아니라 고문실로 불러내 사경에 처하게 했다. 그는 함흥형무소에서 일제에 굴함 없이 싸우다가 1940년 10월16일 옥중에서 생을 마쳤다. 평양의 대성산혁명열사능에 박록금의 유해가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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