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선(채평)의 순국지. 그는 인물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 <연변일보>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북한 정권의 핵심인물인 김책과 그의 형 김홍선이 항일 운동가였다는 사실은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김홍선은 창작과비평사에서 1996년에 펴낸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인명사전에는 ‘조공 만주총국 선전부 책임, 중공 영안현위 서기’, 김책의 맏형으로 소개돼 있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순시원으로 유격대 내 민생단 숙청 사건을 주도하다가 1933년 7월 박두남에게 살해당한 반경유라고 나온다. 그러나 이는 착오다. 반경유와 김홍선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청산리 전투, 황포군관학교, 그리고 북만지역

김홍선(金洪善, ?~1936)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났다. 출생연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동생 김책이 1903년생임을 감안할 때 그보다 몇 년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버지 김지모와 어머니 박씨의 장남으로 동생 김홍계(김책)와 김홍희가 있었다. 김홍선 일가는 생계를 위해 1910년 10월께 두만강을 건너 연길현 수신향(지금의 화룡시 동성진)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김홍선은 간도지역의 반일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합류해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19년 용정의 3·13 반일시위운동에 가담한 뒤 안무의 국민회군으로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직접 참가했다. 그 뒤 1921년 4월 최익룡이 만든 동흥소학교에 참여했고 이주화 등과 함께 동흥중학교로 개편해 교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에는 사회과학연구회·독서회 등이 조직돼 사회주의 사상과 반일의식을 전파하고 보급하는 중심지가 됐다. 동흥중학이 9개 반에 학생수 402명, 교사 9명으로 대폭 늘어나면서 경비난이 심각해지자 김홍선은 1925년께 한장순 등과 함께 회령·웅기·청진·함흥·원산·서울 등 국내 각지를 돌면서 의연금을 모집해 학교운영을 호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1926년 5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설립됐고, 김홍선은 평강군 5도구 세포책임자로 활동했다.

김홍선은 1926년 어느 시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주총국 방침에 따라 혁명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던 광주로 갔다. 나중에 동북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인물이 되는 이상준(이동광, 후에 남만성위 조직부장), 김철산(후에 화룡현위 서기), 방상범(후에 화룡현위 군사부장) 등 다수 사람과 함께했다. 광주에서 채평(蔡平)이라는 가명으로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김홍선은 국민혁명군의 북벌전쟁에 참여했다가, 장개석의 4·12 상해쿠데타가 발발하자 다시 만주로 갔다.

김홍선(채평)은 영안현 동경성에 있던 만주총국을 찾아갔고, 만주총국은 이춘만 등 화요계 5명과 함께 지금의 탕원현(흑룡강성) 오동하로 파견했다. 김홍선 등 조선인 혁명가들은 오동하 복흥둔 하동에서 반일사상을 선전하는 한편, 대중단체를 조직했다. 이곳 탕원은 쑹화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어서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했는데 1924년께부터 조선인 이주민들이 들어와 논농사를 짓기 시작해 1925년에는 600여 가구에 수천명, 후에는 7천여명의 조선인들이 살았다. 김홍선 등은 하동에 초가집을 짓고 라흥학교를 설립해 조선이주민 학생들을 교육하고 반일사상을 전파하며 반제동맹, 부녀회, 소년탐험대 등 반일단체들을 조직했다.

최용건과 탕원 일대에서 활동

김홍선이 탕원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안 만주총국 산하 동만지역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체포되는 ‘1차 간도공산당 사건’이 발생했다. 1927년 5·1 메이데이 투쟁을 대대적으로 벌인 이들은 10월 초 또다시 대대적인 만일 시위를 준비하던 중 간도일본총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만주총국 조직부장 최원택, 선전부장 김동명, 대성중학교장 박재하 등 100여명이 체포됐다. 만주총국은 이동성을 책임비서, 김성덕을 조직부장, 김홍선을 선전부장에 임명하고 수습에 나섰다.

1928년 봄, 광주코뮌에 참여했다가 탈출해 만주로 파견된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최석천(최용건), 이운건(이명 이인근·장세진) 등이 중공 만주성위의 파견으로 탕원현 오동하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복흥툰 라흥학교와 함께 오동하 하서에 송동모범학교를 조직, 하강 전체 지역의 조선학생들을 조직·교양하는 사업을 했다.

조선공산당 화요계로 중국공산당원이기도 했던 최석천은 1928~1929년 배치운·김성강·김정국·마덕산·서광해·장흥덕 등을 확보해 조직을 확대했다. 1929년 11월 최석천·김홍선·이춘만 등은 중공 탕원현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서기 이춘만, 위원 김홍선·배치운·김성강 등 간부들이 모두 조선인들이었다. 1930년 6월부터 최석천·김홍선 등은 송동모범학교에서 군정간부훈련반을 조직해 170여명의 간부들을 길러냈다. 항일연군 여성대원으로 뒤에 헤이룽장성 성장을 지내는 천레이(陳雷)와 결혼하는 이민(李敏), 뒤에 하바롭스크 야영에서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김정일에게 젖을 먹인 이재덕(李在德)도 이곳에서 교육받고, 항일유격투쟁에 참여했다. 최석천은 이때 육성한 이학복(본명 이학만), 박진우 등을 중심으로 요하공농병반일유격대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최석천의 유격대는 이후 이연록이 지휘하는 동북항일동맹군 4군에 편입됐다가 1936년 11월 7군으로 독립했다.

그런데 김홍선은 1933년 초 탕원 일대에서 사라지면서 행적이 뚝 끊기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에서는 김홍선을 반경유(조선인으로 황포군관학교 출신, 중공 영안중심현위 서기, 중공수녕중심현위 서기, 중공길동국 조직부장, 중공만주성위 순시원을 지냄. 본명 이기동)로 잘못 알고, “1933년 7월 유격대내 민생단 혐의자 숙청을 주도하다가 박두남에게 살해됐다”고 기록하는 오류를 범했다. 김홍선의 친동생인 김책(김홍계)도 1941년 자신의 ‘이력서’에서 “1938년에 주보중 동지에게서 들었다”며 “동만에서 민생단 혐의로 피살됐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 김홍선(채평)의 친동생으로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북한 부수상이 된 김책(본명 김홍계).
▲ 김홍선(채평)의 친동생으로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북한 부수상이 된 김책(본명 김홍계).

 

남만에서 항일무장투쟁 중 밀정에게 살해돼

그러면 김홍선은 어디로 갔을까? 김홍선은 1933년 4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에 소환됐고, 남만에 속한 요원(遼源)의 탄광지대에 파견돼 노동운동을 지도했다. 김홍선은 탄광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유격대를 조직, 동북인민혁명군 1군 독립사 1단에 참여했다. 이때 김홍선은 두씨 성을 사용하고 목 뒤에 5센티미터 정도의 혹이 있다고 해서 두대포(杜大包)로 불렸다.

동북인민혁명군 1군 독립사는 1933년 반석현 버리하투에서 중국인 양징위(사장 겸 징치위원), 조선인 이홍광(참모장) 등이 조직했다. 1935년 남만 당조직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35년 5월 이동광을 서기로 하는 중공남만특위는 해룡(海龍)구위원회를 새로 조직하면서 김홍선을 서기로 파견했고,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당조직이 기틀을 잡았다. 1936년 3월 반석에서 농민자위대가 조직돼 1군 2사의 활동을 지원하며 활약했다. 김홍선은 북만뿐만 아니라 남만 항일무장투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36년 3월부터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해 남만·동만·북만 지역에서 모두 3로군 11개 군이 조직돼 전체 병력이 4만명에 달했으나, 일제의 토벌작전이 강화되면서 어려움에 처했다. 1936년 여름 김홍선이 활동하고 있던 반석현 상안둔의 공청단원 왕상이 변절하면서 위기가 닥쳤다. 왕상은 반석일본헌병분견대 소속 밀정 이복과 모의해 김홍선 살해 음모를 세웠다. 왕상은 1936년 9월18일 집을 지을 나무를 잘라야 한다며 김홍선을 깊은 산속으로 유인한 뒤 도끼로 살해했다.

반석일본헌병분견대는 김홍선의 머리를 잘라 반석현성 대남문에 걸어 뒀고, 시체는 산짐승의 먹이로 산에 버렸다. 1960년대와 80년대 두 차례에 걸쳐 반석시 항일운동 관련자들이 그의 유골을 찾아 나섰으나 실패하고 살해된 자리만 확인했다. 밀정 이복은 1947년 중국 토지개혁 때 죄가 들통날까 봐 도망쳤다가 반석현 공안당국에 체포돼 사형판결을 받고, 장춘감옥에 수감 중 옥사했다. 변절자 왕상 또한 해방 후 과거의 죄상이 드러나 처벌받았다.

김홍선의 항일활동을 복원하는 과제

김홍선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일제와 싸웠다. 그러나 북만과 남만에서 혁혁한 활동을 했던 채평이 북만주 항일무장투쟁의 핵심 인물로 북한 정권의 초대 부수상이었던 김책의 친형이라는 사실은 오랫동안 아무도 몰랐다. 한 중국인이 2015년 11월 일본 도쿄의 경매사이트에서 채평 피살사진을 발견하고 추적해 그가 김책의 형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연변의 항일연구자가 채평의 본명이 김홍선이라는 사실을 파악해 그의 토막 난 항일역사를 하나로 엮어 낼 수 있었다.(연변일보 2020년 4월7일자, 13일자, 20일자)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1927년 ‘1차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동생 김홍계(김책)가 서울로 압송돼 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형 김홍선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1930년 1월 출소한 김책이 연길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와 아내 안경숙은 이미 병사한 뒤였다. 집에는 어머니와 철모르는 두 아들 국태와 정태가 남아 있었다. 김책은 어린 두 아들을 처남에게 맡기고 처남이 준 소를 팔아 다시 항일투쟁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형 김홍선은 영안현 동경성에서 부인, 어린 오누이 둘과 생활하고 있었으나 그 뒤 그 가족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김홍선의 항일활동을 온전히 복원하고, 가족들의 삶을 밝히는 과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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