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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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지난달 10일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서 산수(山水) 이종률 선생 묘역 이장식이 열렸다. 산수 선생은 지난 2015년 11월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산수 선생이 늦은 추서를 받게 된 까닭은 해방 후 단정반대운동과 4·19 혁명기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활동을 한 선생이 생전에 독재자들에게 건국훈장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종률은 1902년 6월6일 경북 포항 죽장면에 있는 동대산 기슭에서 부친 이규환과 모친 이점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쇠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에게 한학을 배우고 국내외 정세를 들으며 일찍이 세상 보는 법을 배웠다. 1917년에는 포항 일대를 휩쓴 역병을 피해 의성으로 이주해 1921년 점곡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고, 신학문을 접한다. 하지만 일제 식민교육의 장인 학교보다는 의성 청년운동의 핵심인물인 박명옥의 동생 박명진을 만나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을 더 즐겨 했다. 특히 청소년 단체인 ‘호경체육회’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고, 서구의 ‘공화주의’를 접하게 됐다. 또한 당시 사회적 차별과 냉대 속에서 살아가던 백정들의 신분개혁운동인 ‘형평운동’에도 관심을 둬 직업이 하찮더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깍듯이 인사하는 등 주변을 놀라게 했다.

1924년 봄 이종률은 경성 배재중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 그는 서울에 올라오기 전 안동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동명학교에서 1년간 재학했는데, 여기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조카이며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신간회 안동지회를 설립한 이형국, 대한광복회 단원인 유동붕, 조선공산당과 건국준비위원회 안동위원회에서 활동한 이지호 등 자신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들을 만나게 된다. 경성에 올라와 학교에 다니게 된 것도 이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는 경성에 올라와서도 의성에서 했던 청년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경성청년회 결성에 참여

당시 경성에는 공산주의운동 분파들이 여러 개 있었는데, 각 분파에서는 각각의 청년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화요회는 신흥청년동맹을, 서울파는 서울청년회를, 북풍회는 경성청년회를 조직했으며, 이종률은 경성청년회에 창립부터 참여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경성지역 청년운동 연합단체인 한양청년동맹에 경성청년회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련은 곧 닥쳐왔다. 1925년에만 해도 공학회 사건과 조선고학생갈돕회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공학회는 경성청년회 안에 사회주의 사상연구를 위해 만든 학습모임으로 일경의 감시 대상이 됐다. 고학생갈돕회는 1920년 이상재 선생이 고학생들의 상부상조를 위해 만든 단체였으나, 후일 고학생도 무산계급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사회주의 단체로 변모했다. 이때 이종률은 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주지 않으며 처단(?)하겠다는 협박편지를 친일파 이완용에게 보내 이 일로 체포가 된 것이다. 이듬해인 1926년에는 송학선의 사이토 총독 습격사건으로 예비검속에 걸려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한편 유치장에서 이종률은 한용운을 만나게 된다. 그는 한용운에게 “애국자가 되려면 사형을 당하는 의기보다 고문을 견디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단종복위운동을 한 성삼문이 “이 쇠 차다. 다시 달구어 오라”며 그 의기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어린 시절 부친에게서 여러 번 들었기에, 이후 그는 한용운의 말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가슴속에 간직하게 된다.

와세다대학 유학

유치장에서 한 달 만에 출옥한 이종률은 일제의 겁박에도 굴하지 않고 6·10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러자 곧 그에게 수배령이 떨어졌으며, 이를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가난했던 그의 유학 생활을 도와준 이는 경성청년회에서 만나 김정수와 의성 출신 의열단원 박시목, 그리고 백산 안희재 선생의 아들 안상록이었다. 그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조선유학생학우회 활동에 참여한다. 그는 유학시절 여성운동에 관심을 두고 여성단체인 근우회 동경지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진보적인 여성관을 가르치는 강좌도 개설했다. 이 일로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가 결성됐을 때 부인부장(여성부장)을 맡았다. 조선인단체협의회는 1927년 2월 동경의 민족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계열의 18개 단체가 모여 결성한 단체로 1927년 5월 신간회 동경지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조직이다. 이종률은 신간회 동경지회가 결성되자 지회 간사를 맡았고, 정치문화부에서 활동했다. 한편 방학이 되면 조선으로 돌아와 유학생 순회강연회를 하며 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신간회 동경지회가 간부파와 대회소집파로 나눠지면서 대회소집파에 소속돼 있던 이종률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게 된다. 또한 이종률은 근우회 재일본부가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그의 근우회 활동도 타격을 입게 된다. 그는 경제적인 문제까지 겹치면서 도일 2년 만에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조선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 사건으로 구속

이종률은 1928년 5월 일본에서 귀국하기 전, 귀국 후에도 동경의 인맥들과 연대할 목적으로 동경에 박노수와 함께 조선교육신문사를 설립한다. 같은해 7월 귀국한 그는 경성고학당 교사로 재직한다. 경성고학당은 고학생들을 무상으로 가르치던 학교였다. 이종률도 무보수로 재직하면서 국어와 사회과학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그는 각급 학교에서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동맹휴학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동경 조선교육신문사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을 타도하라’ ‘조선학생은 궐기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제작해 밀반입한다. 그러고는 대구와 서울에 맹휴 중인 학교들에게 보냈다. 이 일로 조선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사건으로 조작됐을 때 그는 구속돼 징역 10월형을 받는다. 이 사건은 서울과 대구 그리고 동경을 잇는 큰 사건으로 비화돼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러타 창간

조선공산당 창당운동과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신간회 등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꿈꿨던 이종률은 20대 후반인 1930년대에 들어서면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꿈꾸게 된다. 무엇보다도 조선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분석해 내는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사회실정조사소를 출범시켜 사회현실분석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1930년 5월 노동절 격문 살포 용의자로 체포되는 바람에 그의 뜻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는 1년이 지난 1931년 7월 이러타(이렇다)사를 만들어 사회실정조사소의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이어 동경에서 알게 된 김추신과 남만희가 결합하면서 조사작업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를 명쾌하게 분석하는 잡지’라는 의미에서 ‘이러타’를 창간하고, 잡지 보급과 자료 수집을 위해 지국을 설치한다. ‘이러타’는 1936년까지 56호를 발간했으며, 전국에 28개 지국을 두고 있었다. 또한 김기진·백남운 등 사회 저명인사들을 동원해 지국을 돌며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종률도 ‘조선 논구의 변증법적 방법’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로 강연에 참여했다. 이러다 보니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그는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와 만나 신간회 해소에 대한 소회를 나누며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 전술’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진행했다.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으로 구속

이종률은 ‘이러타’ 창간 이후 의성 시절부터 관심을 두었던 형평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1923년에 결성된 형평사는 1930년대에 이르러 전국에 40만 회원을 둔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 형평사운동은 백정의 평등권 획득에서 더 나아가 무산계급의 해방운동까지 해 내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조직이 1929년에 결성된 비밀결사 조직인 ‘형평청년전위동맹’이다. 그는 1933년 1월 ‘길한동’이라는 가명으로 중외일보에 형평운동의 당위성에 대한 글을 게재했다. 이 일로 사건이 터졌을 때 체포가 됐다. 하지만 일제는 증거를 찾지 못해 재판은 사건 발생 2년이 지난 1935년 11월에 가서야 시작됐다. 1936년 6월에 이종률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하지만 2년간의 조사 과정에서 이종률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때 그에게 고문을 가한 자는 광주경찰서 고등계 고고로이시 주임과 가쓰미 형사였다. 그리고 구금 중인 1934년 발생한 ‘미야케 교수 사건’에도 연루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출옥 당시 이미 3년2개월을 구금된 상태였으므로 추가 징역은 살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일본 유학을 전후해 경성에서 머무는 동안 경기도 경찰부와 경성 본청, 종로·서대문·동대문·용산경찰서 등 경성 인근의 유치장 중 안 가 본 데가 없을 정도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출옥 후에는 춘천고보의 상록회를 지원했으나, 일제의 보호관찰령으로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됐다. 1940년에는 가평 용문산에 들어가 숯산판장을 경영하면서 강제징집을 피해 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모아 같이 지냈다.

민족건양회 창립

해방은 됐으나 외세의 힘을 빌려 얻은 해방이었기에, 이종률은 여전히 민족합동전선을 통한 민족자주국가 건설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우선 해방 다음날 8월16일 백남운·홍명희 등이 창립한 조선학술원에 ‘이균’이라는 가명으로 상임위원, 서기국 위원, 사학부 책임간사로 참여했다. 또한 1946년 1월5일 이종률은 ‘민족 사회를 혁명적으로 건설해 이를 보다 높은 역사 단계로 지양한다’는 자신이 주창한 ‘민족혁명론’의 의미를 담아 민족건양회를 발족하게 된다. 박진·문한영·조윤제·김창숙·안경근 등이 참여한 이 단체는 4·19 혁명시기인 1961년에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출범의 기초가 될 때까지 17년간 운영됐다. 그는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과 조봉암의 민주주의독립전선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전쟁은 발발하고 말았다.

피난길에 올랐던 이종률은 부산에 머물며 최익환··박진목 등과 정전운동을 벌였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를 맡게 된다. 피난 시절 그는 그의 평생 운동을 담은 ‘민족혁명론’을 정립하게 됐으며, 대학에서 ‘민족혁명론’를 전파했다. 그 결과 그를 따르는 젊은 학도들이 생겨나고 이를 모아 1955년 무렵 ‘민족문화협회’를 창립하게 됐다. 민족문화협회는 첫 행사로 ‘추사 김정희 및 하이네, 슈만 100년제의 밤’과 같은 대중 강연회를 주로 했다. 이 시기 이종률과 함께했던 젊은 학자들은 현재 부산지역 학계와 사회단체 원로들로 남아 있다.

4·19 혁명과 운명

이창훈 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이창훈 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이승만이 하야하기 전인 1960년 4월21일, 이종률은 서울로 올라가 민족건양회 회원들을 모아 ‘4월 목요회의’를 개최한다. 이 회의는 5·16 쿠데타 전까지 벌어진 민족통일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자리였다. 그는 곧 부산 청년들을 모아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을 출범시키고, 이어 서울과 대구에도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민민청은 1961년 2월에 출범하는 민자통 건설 과정에서 주춧돌이 됐고, 쿠데타 발발 전까지 뜨겁게 타올랐던 ‘남북학생회담성사운동’의 핵심조직이기도 했다. 그는 인생에서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고 있었다. 하지만 쿠데타의 주범 박정희는 이러한 그의 열망을 깡그리 앗아 갔다. 그는 환갑의 나이가 지난 1965년 석방돼 잠시 몸을 돌보다가 1970년 개운중학교 교장을 맡으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1974년 제자들과 함께 백산 안희재 생가답사 중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만다. 이후 15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1989년 3월13일 운명해 부산 백운공원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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