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산 김창숙(金昌淑, 1879~1962)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심산 김창숙은 유림 출신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민족적 대의’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인물이다. 그는 민족적 대의에 어긋난다고 판단하면 그 어떠한 위협에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심산은 단재 신채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그의 강렬한 민족주의 정신은 유학의 ‘대의명분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행동 바탕에 엄격한 유교적 대의명분론이 자리하고 있는 그를 두고 많은 사람이 ‘이 땅의 마지막 선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던졌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다.

심산 김창숙의 독립운동은 유교적 기반 위에서 전개됐기에 당시 활발했던 노동운동·농민운동 등 계급운동과는 접맥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의 독립운동은 유교에 기반을 둔 중소자산가를 대상으로 했기에 대중의 힘을 조직해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을 자신의 안일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나라의 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와 교육·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특히 강직한 삶을 살고자 하는 지식인에게 표상과도 같은 존재다.

‘파리장서’를 품고 국외로

김창숙(金昌淑)은 1879년 경북 성주군의 유림 집안에서 태어났다. 명문거족은 아니지만 영남 유림의 뿌리 깊은 전통을 이어받은 의성 김씨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김호림, 어머니는 인동 장씨였다. 면암 곽종석과 이승희 등과 함께 당대 최고 유림의 문인으로 꼽혔다. 호는 심산(心山)이었고, 일제강점기 한때는 어리석다는 뜻으로 김우(金愚)로 개명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의 고문으로 하체를 다친 뒤에는 ‘앉은뱅이 늙은이’란 뜻의 ‘벽옹(躄翁)’이라는 별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심산은 고루하지 않은 집안 탓에 유가적 전통 속에서도 세상의 변화를 느끼며 성장했다. 그가 백면서생에서 처음으로 행동에 나서게 된 것은 1905년 11월 일제의 ‘을사늑약’ 때였다. 김창숙은 스승 이대계를 따라 상경해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심산은 한동안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유학 공부에 정진했는데, 그의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닦인 것이다.

1919년 3·1 운동을 준비하던 민족대표들은 천도교·기독교·불교 외에 유학의 참여를 위해 김창숙에게 급히 상경할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가 병환 중이어서 2월 말 뒤늦게야 서울에 도착했으나 이미 독립선언서 인쇄가 끝난 상태여서 유교 대표들은 빠지게 됐다. 심산은 망국의 책임이 있는 유교가 독립선언에도 참여하지 못한 것을 크게 한탄했다.

3·1 운동의 불길이 한반도 전역으로 번져 가는 가운데 김창숙은 면암 곽종석을 앞세워 전국의 유림들을 규합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준비했다. 1919년 3월23일 주로 영남·충청지역 유림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를 들고 파리로 가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이때 심산의 나이 41세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연령이었다.

중국 망명 시절의 활동과 고난

김창숙은 1919년 3월27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이미 일주일 전 한국독립운동세력의 대표로 김규식 등이 파리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파리행을 보류하고, 장서를 영어로 번역해 파리로 우송했다. 이 파리장서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에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었고, 137명이 투옥돼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영남유림의 거목 곽종석 등이 옥사했다. 이른바 ‘1차 유림단 사건’이다.

김창숙은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경북 대표 의원이 됐다. 심산은 이 무렵 백암 박은식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했다. 3만부를 찍어 2천여부를 국내로 발송했다고 한다. 1919년 11월에는 활동무대를 북경으로 옮기고 단재 신채호가 발행하던 <천고(天鼓)>의 일을 도왔다.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밝혀지자 김창숙은 신채호·박은식과 함께 강력히 성토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여러 정파 간의 갈등과 이승만의 리더십 부재 등 여러 요인이 겹쳐 무력화됐고, 진로를 둘러싸고 창조파·개조파·고수파로 분열됐다. 김창숙은 전면적으로 새로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파의 입장이었다.

김창숙은 북경에서 활동하면서 박은식·신채호·이회영 등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이회영과는 중국 내몽고 지역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땅을 매입할 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심산은 1925년 8월 직접 국내로 잠입했다. 심산은 1926년 5월까지 10개월간 국내에 체류하며 자금 모집을 위해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3천500여원을 마련해 상해로 돌아갔다. 이 돈으로는 황무지 개간 사업을 할 수 없었기에 심산은 의열단원 나석주의 활동에 지원했다. 이 무렵 김창숙은 의열단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제 고문으로 ‘앉은뱅이’ 됐으나…

김창숙은 상해로 돌아간 뒤 1926년 8월 임시의정원 부의장(의장 이동녕)에 선출됐다. 그는 이 무렵 심한 치질로 세 차례의 수술을 받는 등 심하게 고생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이보다 훨씬 심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1926년 12월 말 의열단의 나석주가 조선식산은행·동양척식회사(동척)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김창숙의 국내 잠입 모금 사실을 파악했다. 1927년 2월부터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 600여명이 체포되는 ‘2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했다. 심산이 가장 중요한 체포 대상자가 됐다.

그런데 심산이 체포되기 전 그의 큰아들 김환기가 체포됐다. 김환기는 김창숙이 나이 서른에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그는 열 살 이후부터 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어린 두 동생과 함께 홀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았다. 심산은 1925년 봄 17세가 된 그 아들을 북경으로 불러들였다. 근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환기는 북경에 1년6개월을 채 머무르지 못하고 조선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심산은 회고록에서 ‘아들이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귀국을 명했다’고 기록했지만,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는 “유학·체류 경비를 뒷감당할 경제적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봤다. “혹은 독립운동에 관련된 사명을 부여해 입국시켰을 수도 있었다”지만 그 결정은 지혜롭지 않았다. 아들 김환기는 귀국 얼마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국내에서 ‘유림단 독립운동자금 모금사건’으로 검거선풍이 일면서 사건의 주모자 김창숙의 아들이자 중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김환기가 체포된 것이다. 경찰에 체포된 큰아들 김환기는 만신창이가 돼 출옥했고, 1927년 12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김창숙에게는 그 어떤 일보다 고통이 컸을 것이지만 회고록에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차마 그 일을 되살리기에는 아픔이 너무 컸을 것이다.

김창숙은 1927년 6월 악화된 치질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던 상해 공공조계의 한 영국인 병원에서 체포됐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와 시모노세키, 부산을 거쳐 대구로 압송됐다. 그는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을 받고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일어설 수 있는 병약한 상태였으나 불굴의 옥중투쟁을 전개했다. “나는 대한사람이고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라며 변호사도 거절했다.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14년형이 선고됐으나 항소도 하지 않았다. 변호사를 거절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심산은 감옥 생활에서도 이 같은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그는 간수들의 우두머리인 전옥에게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책을 압수당하는 징벌을 받기도 했다. 그는 전옥이 간수를 시켜 최남선의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를 전해 주자 “일본에 붙은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시끄럽게 짖어 댄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며 책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그런 심산이었지만 몸 상태가 매우 악화돼 1934년 9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하게 됐다. 이후 1945년 해방 직전까지 11년간 휴면기를 가졌다. 그러나 그는 그 기간에도 일본식성명강요를 끝까지 뿌리치며 항일의식을 꼿꼿이 지켜 냈다.

해방 후 분단독재 저항, 민주화 투쟁

1945년 8월7일 김창숙은 성주경찰서에 체포됐다. 1944년 여운형·조동우·현우현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라는 이유였다. 김창숙은 해방 직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에 뜻을 같이했으나 9월6일 인민공화국 선포 후 멀어졌다. 심산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후 우익의 반탁 주장에 동조했으나 이승만·한민당의 단정노선에는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하고 분단이 가시화되자 김창숙은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와 함께 ‘7거두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7거두 성명 이후 김창숙은 정치활동은 중단하고 교육활동에 전념했다. 1946년 9월 성균관대를 설립해 초대학장이 됐고, 1953년 종합대학 승격 뒤에는 총장이 됐다. 1952년 이승만이 정권 연장을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자 이에 저항하다가 두 차례나 부산형무소에 갇혔다. 1952년 6월에는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던 중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하반신을 못 쓰는 심산은 의장석에 앉은 채 도망도 못 가고 피를 흘려야 했다.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승만 독재에 끊임없이 저항했던 김창숙은 이승만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957년 7월 이승만 정권은 유도회 분규를 사주하고 깡패들을 동원해 심산을 몰아냈다. 이후에도 심산은 불굴의 의지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저항했고, 마침내 82세 나이로 병상에서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들었다. 상해 시절부터 이승만과 각을 세웠던 심산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1962년 3월에야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 1962년 5월 심산이 84년간의 고달픈 생의 막을 내렸을 때 ‘숫벼룩 한 마리 꿇어앉을 땅도 없는’ 궁벽한 상태였다. 그는 평생을 민족독립과 통일·민주화를 위해 헌신했으나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물질적으로는 빈한했으나 정신적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골 선비정신’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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