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박영 선생(1887~1927)
▲ 박영 선생(1887~1927)

전 세계에 혁명의 아이콘으로 각인된 체 게바라에 대해 줄줄 외우는 노동·진보 활동가들도 정작 우리나라의 피어린 민족해방운동사에 묻혀 있는 숭고한 국제주의 혁명전사들을 잘 알지 못한다. 식민과 분단, 냉전의 100여년이 자료도 연구도 교육도 실종시켰기 때문인가.

의사였던 체 게바라는 인체의 병보다 사회의 병을 먼저 고치기 위해 라틴아메리카 반제투쟁에 투신했다. 쿠바 혁명에 성공하고도 안주하지 않고 아프리카 콩고 내전 지원을 거쳐 볼리비아 게릴라 투쟁에 뛰어들었다가 붙잡혀 미국 CIA의 배후조종으로 총살당했다. 그런데 체 게바라 사망 근 50년 전부터 조선에는 유명·무명의 ‘체 게바라’들이 많았다. 빼앗긴 나라를 찾고 민중을 해방하려는 일념으로 러시아혁명, 항일무장투쟁, 중국 국공내전 등에서 동북아 산야에 뜨거운 피를 쏟은 ‘조선의 체 게바라’들이 그 얼마였던가.

어릴 적에 의병투쟁을 지원하고 소학교 교사를 하다 독립군으로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에 앞장섰으며, 한인 빨치산부대를 이끌고 러시아 내전에 동참해 연해주 해방을 이루고도 소비에트 건설에 머물지 않고 다시 중국 광주로 건너가 장개석 반혁명 쿠데타에 맞서 봉기와 코뮨을 선도하다 학살당한 박영이 그중 한 사람이다. 박영(1887~1927)은 만 40세에 대도시에서, 체 게바라(1928~1967)는 만 39세에 산악에서 둘 다 다른 나라 혁명의 폭풍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확히 40년 시차가 있지만, 반제 민족해방·민중해방을 위해 국경을 초월해 총을 들고 싸우다 열사가 됐다는 점에서 똑같은 국제주의 혁명전사의 표본으로 세계 자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의 심장을 두드린다.

청년 시절의 의병 지원, 구속 고문

박영은 우리나라 최북단,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에서 농민 박시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는 박성남으로 불렸고 운동 과정에 박응세·박근성·박진·박영·몽각 등 여러 가명을 사용했다. 어릴 적 서당에 다니다 갑오년 농민혁명-청일전쟁 이후 더욱 기울어지는 나라의 형편과 민중의 삶을 걱정하는 애국심을 가졌다. 1896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1차 의병, 1905년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 이후 2차 의병, 1907년 군대 해산의 정미조약 이후 3차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은 일제의 폭압과 추격으로 박영의 고향, 조선 북부 국경지대로 몰렸다.

이때 18세 열혈청년 박영은 학업을 중단하고 반일활동에 떨쳐나섰다. 우선 가족을 설득해 절구통에 찧은 쌀을 의병부대에 보내고 청년들과 함께 군자금 등 물자를 모았다. 경흥 일대 의병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됐다. 연해주로 건너갔던 의병 100여명이 1908년 7월6일 경흥군 고읍·동남·증산으로 진입해 경흥수비대를 습격했고 나흘 뒤인 10일 의병 200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경흥군 서부 신아산에서 적을 섬멸했다. 일제는 웅기·경흥·회령 등지의 수비대를 총동원하고 보병 49연대 9중대까지 끌어다가 토벌했지만 민중의 보호와 지지로 의병들은 농민으로 변장해 포위망을 빠져나가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이주, 사립학교 교사, 짧은 일본 유학

그해 여름 21세 박영과 부친 박시겸이 일경에 체포되고 경흥수비대에 감금돼 고문을 당했으나 절개를 지키며 굴하지 않았다. 2개월 만에 풀려난 박영 부자가 만신창이 몸을 추스르던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 일제의 조선강점이 이뤄졌다. 한때 활약했던 의병운동도 일제의 폭압으로 잦아들고 박영 일가는 요시찰 대상이 돼 특별 감시를 받았다. 이에 23세 되던 1910년 가을 박영은 새로운 투쟁 무대를 찾아 가족을 데리고 두만강을 넘어 화룡현(지금의 용정시) 삼동포로 이주했다.

1911년 초 박영은 일본 동경으로 갔다. 몇 개월의 일본 생활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메이지대학에 다니며 제국주의 열강의 약육강식과 이에 저항하는 식민지·반식민지 민중들의 민족해방운동 흐름을 봤기 때문이다. 특히 신해혁명으로 수천년 누대의 청나라 봉건체제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그를 크게 흥분시켰다. 박영은 즉시 삼동포 집으로 돌아왔다. 먼저 사립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신문화를 가르쳤다. 60여명의 뜻있는 청년들을 계로 조직해 반일 의식화 작업을 했다.

1915년 5월7일 중국 총통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일본에 굴복해 21개 조항을 체결하자, 박영은 이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반일감정을 고조시키고 무장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이미 최진동 3형제가 근거지를 조성하고 있는 왕청현 봉오골로 이동했다. 최진동·최운산·최치흥은 청나라 지방군대 간부를 지내며 군사 역량을 배양하고 황무지였던 봉오동을 매입해 1910년 한일병탄 이후에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있었다. 1912년에는 청나라 지방군대에서 1개 중대 병력을 데리고 나와 사병으로 만들고 조선의 망명 청년들까지 수백 명 규모로 성장해 1915년 봉오골 뒷산에 연병장과 막사 3개 동을 지을 때였다.

봉오동전투의 숨은 참모

박영은 봉오골 소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반일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반일단체 책임자들과 정치활동을 활발히 했다. 1917년께 난징(남경) 금릉대에서 한 차례 더 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그는 1919년 3월13일 용정의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봉오골 등 왕청현 일대의 반일 집회를 열었다. 1919년 6월 ‘군무도독부’가 창설됐을 때 최진동은 사령관, 박영은 참모를 맡았다. 1920년 3월 박영 등의 부대는 온성·무산 등 국내에 여덟 번이나 진공해 일제에 타격을 줬다. 그해 5월 최진동 3형제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에서 박영은 통신과장 역할을 수행했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최운산이 연해주에서 구입해 온 체코군 신식무기로 무장해 그해 6월 일제 정규군과의 최초 전투인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1920년 10월21일~26일 홍범도·김좌진 등의 부대가 연합작전으로 청산리대첩을 벌이고 있을 무렵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는 봉오골에서 라자구로 이동해 이범윤 등 여러 독립군 부대들과 대한총군부를 설립하고 소규모 전투를 통한 청산리 서부전선 지원, 일본군 토벌작전 교란, 연해주 독립단체와 연계, 서부전선 군수품 공급을 담당했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연이어 대패한 일제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우고 1만8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3천690여명을 학살하는 경신대참변을 자행했다. 1920년 10월 말 박영은 최진동 부대와 동행해 중러 접경 밀산을 거쳐 러시아 경내의 이만(지금의 달네레첸스크)으로 이동했다. 독립군 부대들이 재편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의 군수과에서 무기 구입과 사관생도 모집 활동에 헌신했다.

한인 공산당연합회 회장, 연해주 해방전투 참가

이 시기 박영은 오직 사회주의만이 무산대중과 피압박 약소민족 해방의 길이라 생각해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하바롭스크의 프리아무르주 한인 공산당연합회 회장에 취임하고 군비단 등 이만의 독립군부대들 안에 야체이카(세포조직)을 추진하고 당원과 후보 당원을 확대했다. 그리고 박공서를 군대 영입부장으로 파견했다. 이만의 러시아혁명군 2군과 교섭해 독립군을 받아들이게 해 간도에서 온 독립군 부대들이 러시아 이만에 집결한 후 열차를 타고 자유시로 무사히 이동할 수 있게 했다.

박영에게 변화된 자유시 분위기를 전해 듣고 이만에 눌러앉은 ‘군비단’은 자유시사변 당시 적위군의 무장해제를 피해 탈출한 김규면·장기영·이용·한운용·임상춘 등 100여명의 독립군들을 받아들여 대한의용군을 발족하고 이준 열사 아들 이용을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박영은 볼세비키당 한인 조직 책임자로서 대한의용군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1921~1922년 연해주해방전투에서 백군 및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921년 12월 인스크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는데, 독립운동 지도자 김규면은 훗날 “박영은 부상당한 채로 그냥 싸웠다”고 회고했다.

1922년 일곱 차례의 블라디보스토크 해방전투에 참전한 박영은 다시 크게 다쳐 이만으로 후송돼 치료 후 조선인 중학교의 교사로 일했다. 1923년에는 러시아 극동민족소비에트 위원에 이어 주석직을 맡았다. 그러나 1922년 10월 연해주 해방, 러시아 내전 종식 이후 러시아 적군이 일제의 재침을 우려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시도하자 수십 명을 이끌고 만주 영안현으로 이동했다. 이때 독립운동가들은 소비에트 건설에 헌신하는 게 조선독립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과 러시아혁명이 완수됐으니 또 다른 혁명을 위해 간도나 조선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렸는데, 박영은 단호하게 계속 혁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장개석 반공 쿠데타에 맞선 광주봉기의 선봉

그는 1924년 안동현(지금의 단둥)에서 백산무사단 부단장으로 활동하고 1926년 조성환·김좌진 등의 신민부와 잠시 함께했는데,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의 갈등이 격화돼 고민하던 중에 중국 광주(광저우)에서 이용이 편지를 보냈다. 박영은 아내 류성희, 두 동생 근만·근수와 함께 쑨원의 국민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도가니가 된 중국 광주로 달려갔다. 조선독립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또 하나의 혁명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박영은 중국 국공합작의 산물인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일하고 그의 두 동생은 보병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듬해 1927년 4월18일 장개석이 반공쿠데타를 일으켜 황포군관학교의 공산당원과 조선인 혁명가 수백 명을 검거·학살했다.

이를 피해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로 옮긴 박영 집안의 네 사람은 국민혁명군 2방면군 4군 군관교도단에 들어갔다. 군관교도단이 남하해 같은해 10월 초 광주 사오관에 진주할 때 박영은 교도단 교도대 대장을 맡았다. 11월 말 중국공산당 광동(광둥)성위원회는 12월13일을 봉기의 날로 정했고 박영의 교도대가 주력부대가 됐다. 정세 급변으로 이틀 앞당겨 12월11일 이른 새벽 무장봉기를 일으켜 광주코뮨을 건설했으나 일본 등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군과 군벌군의 반격으로 삼일천하로 실패했다. 그가 이끌던 조선인 60명 등 총 200명의 돌격대는 퇴각 명령도 전달받지 못한 채 1927년 12월21일 결사 항전을 하다 몰살당했다.

“조선 혁명이 완성되기 전까지 내게 평화는 단지 고통일 뿐”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박영은 이렇게 반제 민족해방-민중해방을 위해 숭고한 국제주의 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다 40세 일기로 희생됐다. 39세의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총살당한 지 정확히 40년 전 일이다. 1927년 광주코뮨에는 장지락(김산)·김성숙·오성륜·이용·최용건 등 알려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참가했다. 그 가운데 김산은 님 웨일스의 〈아리랑〉에서 “광둥에 온 가장 우수한 조선인 혁명가의 전형적인 인물은 박영 부부와 그의 두 동생이었다”고 증언하면서 박영이 김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 혁명이 완성되기 전까지 내게 평화는 단지 고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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