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기념관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독립운동의 방략과 노선에는 강대국이나 국제 사회에 호소해서 독립을 얻으려고 하는 외교론, 실력양성을 선행하자고 하는 준비론, 노동자·농민을 민족해방의 주력군으로 삼고자 했던 대중봉기론, 독립전쟁론에 기초해서 일제와 싸웠던 무장투쟁론 등이 있었다. 이 중 무장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은 국경과 가까운 간도를 비롯한 만주 일대와 연해주다. 그러나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일어난 무장투쟁은 잘 알려져 있는 데 비해 상대적으로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일어난 투쟁은 아직도 생소한 부분이 적지 않다.

연구가 덜된 부분도 있지만 1922년 소련 당국이 일제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한인 무장단체들에 대해 무장해제를 하도록 명해 중국 관내에 비해 무장투쟁의 역사가 20년대 초반까지로 한정되는 점과,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 지역에 살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케 한 점도 들 수 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성공해 백군과의 내전 상태에 돌입하고 일본을 포함한 국제 간섭군이 출병하자 연해주 지역 한인들은 사회주의와 민족해방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다.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지만 백추(白秋) 김규면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독립운동의 방편, 선교사 활동

김규면은 1880년 3월12일 함경북도 경흥군 두루봉촌에서 빈한한 가정에서 5형제 중 막내로 출생했다. 그는 상경해 한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뒤 교육자가 되려 했지만 힘들어지자 군인이 되기 위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군인이 될 수 없었다.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체결해 무관학교 학생들이 차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생계를 위해 원산에 있던 중 펜윅이라는 선교사를 알게 돼 기독교에 입문하게 됐다.

교육에 대한 자유도 없었기에 목사가 돼 교회를 이용하면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기도니 찬송가니 성경 말씀이니 하는 비과학적 객담으로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또는 천만 수상한 허부잡담의 논리를 분간성이 약한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을 절대 못할 일이다”고 회고했다. 이를 봐서는 기독교 교리에 충실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는 교회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다.

신민단 결성

김규면은 1907년 가족과 함께 만주 훈춘으로 망명했다. 그는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 회원으로서 신교육 운동에 참가했다. 1913년 조선총독부의 포교 규칙이 발표되자 언더우드·게일 같은 영미 선교사들조차도 총독부에 순응하는 것을 보고 그가 속한 침례교 교단을 나와 독자적인 교단을 만들었다. 포교 규칙은 매년 포교자 명부를 조선총독부에 신고해야 하고 일제 경찰이 포교 규칙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교회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가 창의적으로 만든 독립교단은 ‘성리교(聖理敎)’였다. 훈춘현 초모정자에 교단 본부를 두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교회는 300여개에 달하고 인원은 3만여명이 됐다.

이를 기초로 ‘신민단’을 결성했다. 신민단은 신민회를 계승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신조선의 신민이 되고 신세계의 신민이 되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어떻든 신민단은 민족혁명운동과 조선민족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조국의 완전독립을 강령으로 삼았다. 김규면은 신민단 단장으로서 이를 기반으로 군자금 모집과 군인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와 훈춘·연해주 지방에 유격대를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

1919년 2월8일 동경 학생운동과 같은해 3월1일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자 그해 4월 한인사회당과 통합하면서 신민단은 한인사회당의 비밀 군사조직이 됐다. 한인사회당은 이동휘를 중심으로 1918년 4월에 결성된 정당으로 세계혁명 마르크스주의적 집단으로 볼셰비즘에 입각해 사회주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다.

김규면은 한인사회당 부의장이자 군사부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전쟁시엔 고려 빨치산군대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전선·후방·조직·지도를 총주관했다. 이후 연해주 일대의 무장투쟁 조직에 신민단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고 연해주 일대 고려 빨치산조직을 내오거나 통합하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한인사회당이 고려 빨치산운동의 싱크탱크라고 한다면 신민단은 그 네트워크의 중심이 돼 갔다.

간도와 연해주에서 항일무장투쟁

1920년 6월 독립전쟁의 1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봉오동전투가 있었다. 봉오동전투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뿐 아니라 신민단·의군부·의민단 등 북간도 지역의 무장투쟁 대오들이 통합해 이뤄낸 역사적 승리였다. 김규면은 통합운동의 주역이었다.

김규면은 1921년 한인사회당과 대립하고 있었던 고려혁명군정의회에게 체포될 뻔한 적이 있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김기룡이란 자가 와서 체포하려 하자 흑하 당국이 “당신들 국가도 독립 못됐는데 치외법권은 언제 가졌는가? 그런 비법적 요구는 거절한다”고 했다 한다. 위기를 넘긴 그는 1921년 대한의용군사회 고문이 돼 러시아 이만전투에 참전했다. 프리아무르주의 군정의회 전권위원 겸 고려빨치산 군사회 위원장에 임명돼 소비에트 당국과 교섭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22년 5년에 걸친 러시아 내전이 종식해 마침내 연해주가 해방됐다. 백군이 패퇴하고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출병했던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 것이다. 무장투쟁에 종사했던 한인들에게는 소비에트 정부에 가담해 건설 사업에 참여하거나 붉은 군대에 편입되는 길이 있었다. 김규면은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러시아 관내를 나와 중국으로 향했다.

상해에서의 활동

상해로 간 그는 임시정부에도 참여했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에 속해 있기도 했으며 1924년에는 임시정부 교통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4년 상해청년동맹회를 조직하고 11명의 집행위원 중 한사람이 됐다. 당시 상해에는 갖가지 독립운동 단체들이 난립하고 파쟁도 심했다. 그는 피습당해 왼팔에 총탄을 맞아 부상당하기도 했다. 1925년 5·30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상해청년동맹회를 통해 중국 학생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1925년 11월 사회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한인 청년들을 황포 군관학교로 보냈다. 한인들로 구성된 북벌지원 군대를 만들어 광동으로 파견하며 중국혁명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7년 4월12일 장개석이 반동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회주의자들을 마구잡이로 탄압하자 김규면은 중국을 떠나 다시 연해주로 돌아왔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일하며 연해주 지역 빨치산위원회를 지원하는 일을 했다. 1933년 10월 원동 해방 10주년을 기념해 연해주 해방전쟁에 기여한 공로로 포상받았다. 그런데 돌연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 비서 프셰니친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병 치료차 사마라와 크림반도를 거쳐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1967년 러시아 혁명 50주년을 맞아 소비에트 정부에게 적기훈장을 수여 받았다. 1969년 2월 88세의 나이로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모스크바에서 영면
 

▲ 노세극 직접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 노세극 직접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김규면의 묘소는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있다. 이곳은 아무나 묻힐 수 없는 곳으로 안톤 체호프, 고골리 같은 유명한 문학가와 흐루시초프·옐친·유리 가가린 등 러시아에서 공적이 있는 사람들만 묻히는 곳이라고 한다.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김백추라는 이름으로 안장돼 있는데 그의 두 번째 부인 김나자(나제스다)와 합장돼 있다.

그는 생전에 “노병 김규면 비망록”이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약술하고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30여명의 독립운동가들과 빨치산 투쟁에 대해 기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러시아와 중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한 백추 김규면. 그에 대한 자료는 여기저기 편린으로 남아 있다. 그런 조각들을 모아서 그의 생애를 더 조명하고 밝힐 수 있는 전기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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