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가 일 때문에 정신질병에 걸려 숨졌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근로복지공단이 잘못 판단하면서 공단의 소송 패소율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 재해를 조사할 때 쓰이는 지침이 보수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지난해 업무상 자살 10건 중 3건 ‘공단 패소’
<매일노동뉴스>가 20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박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받은 자료에 따르면 공단이 정신질병 사망에 대한 산재를 불승인해 수행하는 소송은 매년 늘고 있다. 2020년 29건에서 2021년 32건, 2022년 48건으로 점차 증가하다가 2023년 61건, 지난해 75건으로 훌쩍 뛰었다.
특히 확정사건에서 공단의 패소율이 눈에 띈다. 2020년 8.3%를 기록한 뒤 2021년 18.2%, 2022년 36.4%, 2023년 17.6%, 지난해 35.5%로 늘어났다.
공단의 ‘정신질병 업무관련성 조사 지침’을 보면 다소 모호하거나 보수적이다. 이 지침에는 노동자의 사망이 얼마나 업무와 관련성이 있는지를 볼 때 업무 스트레스 수준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는 예시가 담겨 있다. 장기간 입원을 요하거나 원직장 복귀가 곤란한 수준의 질병이나 부상이 발생한 경우, 타인에게 장기간 입원을 요하거나 원직장 복귀가 곤란한 수준의 부상을 입게 하고 사후 대응에도 관련하게 된 경우 등이다.
또 공단은 도산 또는 큰 폭의 실적 악화, 신용 하락 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실수를 했고 사후 대응에도 관련하게 된 경우도 예시를 들었다. 실수의 정도가 약하더라도 사후대응에서 징계, 강등, 월급여를 넘는 배상책임을 추궁받게 되는 등의 불이익을 받고 직장내 인간관계가 현저히 악화돼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봤다.
괴롭힘과 관련해서는 기준이 더 까다롭다. 심한 괴롭힘, 따돌림, 또는 폭행으로 자살하면 업무 스트레스가 높다고 봤는데, △부하직원에 대한 상사의 언행이 업무지도의 범위를 벗어나 있으며, 인격이나 인간성 모독을 하는 것과 같은 언행이 포함되며, 이것이 집요하게 이뤄진 경우 △동료 등에 의한 여러 사람이 결탁해 인격이나 인간성을 모독하는 언행을 집요하게 했던 경우 △치료를 필요로 하는 정도의 폭행을 당한 경우가 예시로 포함돼 있다. ‘집요하게’ ‘심하게’ 등의 표현이 모호할뿐더러 업무와 사망과의 상관관계를 판단할 때 종합적인 판단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다.
“업무관련성 있다” 공단 판단 뒤집은 판례 쌓여
박해철 의원 “법원 판례 반영해야, 지침도 재검토”
공단 판단 기준이 지나치게 지엽적이거나 보수적이라는 점은 실제 판례에서도 드러난다. 공단은 2022년 직장 인근 아파트 공사현장에 들어가 9층에서 투신한 네트워크 관리 노동자와 관련해 “업무와 정신이상 사이의 관련성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며 유족급여와 장례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고인은 발생 전 2주간 계속해서 야근과 초과근무를 했고, 주말에도 데이터센터 이전 모의훈련 지원을 하느라 다음날 새벽 또는 오전에 퇴근했다. 인수인계가 빠듯해 동료들이 고인의 질문에 답변을 못 해주는 경우가 많았을 뿐더러 이전 담당자도 부재했다. 가족과의 통화도 길게 하지 못할 정도로 업무가 바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법원은 “고인의 업무가 주는 심리적 부담, 과로와 연장근무, 휴식부족이 원인이 돼 퇴근 후 심한 초조상태에 이르러 자살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공단의 판단을 부정했다.
업무 상관관계가 밀접한데도 고인의 조울증·우울증과 가족 간 갈등을 이유로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초등학교 보육교사·교육실무사로 일했던 고인은 업무량 과다와 교장의 욕설·폭언으로 고통을 호소하다 자택 화장실에서 목을 맸다. 교장은 고인에게 ‘일처리를 바보같이 해서 학교에 먹칠을 했다’ ‘어딜 감히 교장에게 따지냐’ ‘지랄하고 자빠졌네’ 등의 폭언을 했다.
법원은 “사정들을 종합해보면, 망인은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장애를 앓게 됐고, 우울장애로 인해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자살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고 판시했다. 2020년 9월 공단의 처분이 약 2년 뒤인 2022년 6월 뒤집혔다.
박해철 의원은 “공단이 정신질병에 따른 사망에 지나치게 신중을 기한 결과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법원을 찾아 다시 판단을 받아야 하는 안타까운 일이 늘고 있다”며 “법원 판례를 공단 판단에 반영하는 작업이 시급할 뿐더러, ‘집요하게’ ‘심하게’ 괴롭힘을 당해야 업무 스트레스가 높다는 예시를 든 공단 내부 지침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단은 “연 7천건 정도 소송을 수행하는데 업무상 자살은 30건에도 미치지 못해 공단 패소율의 유의미성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업무상질병 패소 판례와 관련한 정책연구를 진행 중이고 해당 연구결과를 반영해 제도개선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지침은 재해조사 담당자의 조사 방법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며, 담당자가 다양하게 충분한 자료를 수집해 업무상 질병 여부를 판정위원회에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