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이봉원입니다. 이름 물었더니 답이 술술 이런 식이다. 대학에서 청소일을 한다. 5년째다. 올해 61, 자식 둘은 다 컸다. 그 나이로 안 보인다니, 그런 얘기 자주 듣는단다. 봄 축제로 들썩거리던 교정엔 넘치는 웃음만큼이나 쓰레기가 넘쳐 나기 마련인데, 전 같지는 않단다. 자정노력이다. 학생들은 이날 청소 경비 노동자들에 점심을 대접하며 고마운 마
알록달록 화려한 색 뽐낸 봄꽃이 능숙한 삽질에 뽑혔다. 소용을 다 했다. 그 자리 여름꽃이 대신한다고 한다. 한철이 금방이다. 녹지관리 노동자가 구슬땀 뽑아 가며 손 바삐 놀렸다. 모자와 토시로 초여름볕을 견뎠다. 어느 은행 노동조합의 조끼를 작업복 삼았다. 노동조합의 노자를 지웠고, 가슴팍 단결투쟁 문구도 일부 가렸지만 알아보는 데 문제가 없었다. 주인
늦은 밤, 덜그럭거리는 연장 가방 메고 아버지가 왔다. 술냄새가 폴폴, 오래 삭힌 홍어 냄새가 거기 섞였다. 취기에 비틀거리던 아버지가 새로 산 흰색 농구화를 밟을까 걱정했다. 유명 상표였는데, 어머니를 오래도록 졸라 얻어 낸 것이었다. 아래만 지켜보고 전전긍긍 섰는데, 아버지가 껴안고 얼굴을 비볐다. 정리 안 된 수염이 까칠해 나는 뒤로 내뺐다. 평소 무
널따란 플라스틱 화분에 거름기 많은 흙을 채웠고 씨앗을 뿌렸다. 강낭콩과 분꽃, 해바라기며 채송화와 봉선화까지 종류도 가지가지. 물 주기를 잊지 않고 살폈다. 햇볕과 바람을 신경 썼다. 어느 날 아침 새싹이 삐죽 여기저기 솟았다. 하루하루 달랐다. 가만히 들여다보기를 즐겼다. 한 시간도 훌쩍 갔다. 사방천지에 널린 게 새싹이고 꽃인데, 시간 들이고 마음 준
비닐로 지은 농성장은 여기저기 낡았지만, 증축을 거듭해 나날이 튼튼했다. 그럴듯한 여닫이문도 붙었다. 온갖 사연 새긴 조끼와 선전물이 치렁치렁 걸렸다. 거기 머리숱 적은 사람이 살았다. 192일째라고 팻말 걸었다. 강성노조 때문에 건실한 회사가 문을 닫는다고 언젠가 집권당 대표가 말했고, 노동개혁 깃발이 곧 여기저기 무성했다. 발끈했다. 농성을 시작했다.
넘어져도 아이는 곧잘 일어나 뒤뚱거리며 사방을 향했다. 거기 물가였지만 엄마 눈이, 손길이 서툰 걸음마보다는 빨랐다. 봄볕이 따뜻했고, 바람은 살랑살랑. 이 좋은 봄, 엄마 얼굴에 웃음꽃 피우는 사월이다. 손잡아 설레는 청춘은 걸음걸이 호흡 맞춰 내내 경쾌했다. 징검다리 건너면서도 잡은 손 놓지를 않았다. 아이를 보면서 함께 웃었다. 사랑 꽃피는 봄, 아름
주름지고 거칠어 볼품없는 저기 늙은 손이 한때 고왔다. 봄볕에 녹아 부푼 흙 사이로 삐죽 고개 내밀던 초록빛 새싹만큼이나 언젠가 그 손에도 생기 넘쳤다. 땅을 일구고 밥 짓고 불 때고 아이를 키워 내느라 돌볼 틈이 없었다. 손톱 밑엔 흙이 들어 빠질 줄 몰랐다. 나날이 거칠었다. 못이 박였다. 철 따라 나랏일 맡겨 달라며 누군가 뽀얀 손 내밀어 그 손을 꼭
봄맞이하느라 사람들이 바쁘다. 노랑 파랑 빨강 온갖 꽃과 어린나무를, 또 잔디를 심는다. 물을 주고 살뜰하게 보살핀다. 잔디를 밟지 마시오, 경고문 세워 안전을 보장한다. 봄볕 아래 초록빛 쑥쑥 잘도 자란다. 투실투실 잔디 더미가 저기 가득. 얼음 지치던 광장에도 어느덧 봄이다. 거기 동료 떠나보내느라 노동자들이 상복 입고 바쁘다. 국화를 꽂고, 향을 심는
광화문광장에 봄볕 들었다. 부지런한 꽃장수가 한 단에 2천원 하는 노란색 프리지아 따위 온갖 봄꽃을 늘어놓았으니 거기 꽃길이었다. 안테나 높이 세운 방송 중계차가 그 옆 새로 생긴 호텔 앞자리에 빼곡했다. 언젠가 통신비정규 노동자 올라 농성했던 전광판엔 내내 바둑판이 떴다. 건널목 선 사람들이 저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 논했다. 해고된 통신비정규
소름 끼치도록 기분 나쁜 굉음이 마치 기름 떨어진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듯, 방 끝에 있는 커다란 텔레스크린에서 터져 나왔다. ‘증오’가 시작된 것이다. 여느 때처럼 인민의 적인 골드스타인의 얼굴이 스크린에 비쳤다. 여기저기서 관중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갈색 머리칼의 여자는 공포와 혐오감이 뒤섞인 비명을 꽥꽥 질렀다. 골드스타인은 변절
눈이 쏟아졌고 제법 쌓였다. 2월 말, 언젠가의 벚꽃노래 다시금 음원 순위표를 슬슬 기어오르던 봄 가까운 날이었다. 렛잇고 렛잇고 후렴구만을 겨우 외우고도 신나서 무한반복 노래하는 딸아이 손을 잡고 눈밭을 굴렀다. 눈덩이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뽀드득 소리가 나던 눈은 잘 붙어 금세 커졌다. 나뭇가지 주워 눈코입을 빼뚤 붙이니 그럴듯했다. 아이는 내내
권력자도, 거기 줄 선 어느 진실하다는 권력 꿈나무들도 모두가 청년을 말하고 걱정한다. 청년일자리 걱정에 자다가도 몇 번을 깨 통탄한다니 그 사랑이 깊다. 말끝마다 청년이다. 이게 다 발목 잡는 야당 탓이라며 주먹 내리쳐 가며 편 가른다. 야당이며 여느 진보진영도 청년을 말한다. 흙수저와 헬조선 따위 청년발 신조어를 현수막이며 토론집 제목으로 삼았다. 변화
“일단 모두 물에 빠뜨려 놓고 꼭 살려 내야 할 규제만 살려 두도록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대통령이 말했다. 사람들은 침침한 눈을 비비며 노안을 의심했다. 귀를 팠다. 문득 슬퍼진 사람들이 할 말을 잃었다. 왈칵 뜨거운 것이 올라와 서러웠다고 겨우 적었다. 언젠가 4월16일, 큰 배가 진도 앞바다 맹골수로에 빠졌다. 배에 탄 사람 대부분
구불구불 먼 길 견뎌 찾아가 꼭 쥔 손에 주름이 나이테처럼 늘었다. 마른 장작처럼 거친 손에 슬쩍 쥐여 드린 봉투는 홀쭉했다. 죄송한 맘 전하려 보탠 말이 길었다. 전을 부쳤다. 새 아침 엎드려 절하는 것으로 예를 갖췄고 넘치는 복을 주거니 받거니 나눴다. 새해 바람을 되새김질했다. 세뱃돈 봉투가 또 홀쭉했지만, 덕담이 풍성했다. 건강과 취업과 결혼이며 승
명절 앞둔 도심 네거리엔 차도 사람도 많아 분주했다. 어딜 가나 꽉 막혀 체증은 풀릴 줄을 몰랐다. 마음 급한 누군가 무리한 끼어들기에 나섰다. 창문 내린 운전자가 홧김에 욕을 뱉었다. 빵빵 경적 소리에 일대가 소란스러웠다. 거기 곳곳 때 이른 봄 노래가 울려 섞였다. 입춘인 줄 어찌 알고 날이 좀 풀렸고 햇볕이 구석구석에 미쳤다. 동화면세점 앞 금속노조
노동조합 조끼와 모자 달린 두툼한 점퍼, 튼튼해 보이는 등산화와 등에 메는 가방까지 익숙한 모습이다. 아무 데고 주저앉는 데에도 거리낌 없다. 흔한 풍경이다. 누군가 꺼내 든 두툼한 종이 책이 다만 낯설었다. 사람들은 요즘 한자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다. 저마다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뉴스를 검색하고,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훑는다.
네 살 딸아이가 식탁에 앉아 외쳤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수저 들어 박자까지 맞추는 게 기특해 맞장구쳤지만, 뒤끝이 씁쓸했다. 응원 열기 뜨거웠던 그 광장에서 울고 웃던 청년들은 흙수저 들고 지금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용시장도, 노정관계도 꽁꽁 얼어붙었다고 뉴스는 전한다. 절망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은 더는 이 나라를 응원하지 않는다. 광
청년들은 옛 일본대사관 터 맞은편 길바닥에 앉아 식은 백설기를 뜯고 미지근한 차 한 잔을 나눈다. 어둑어둑 심상찮던 하늘에서 눈발 날아와 덮고 앉은 솜이불 위에 소복 쌓이는데, 툭 한 번 털고 만다. 자릴 오래 지킨다. 옆자리 가만 선 가수가 고무장갑처럼 붉은 손을 해서 통기타 줄을 부지런히 잡고 뜯는다. 순서 기다리던 또 다른 가수가 아에이오우 언 입을
새 해가 떴다. 어제 또 그제의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 애써 의미를 찾는다. 매듭 삼아 오늘 더 새롭기를 바란다. 그 새벽 어디 높은 곳이며 땅끝을 찾아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볕은 대체로 공평한 편이어서 새벽어둠과 추위를 견디던 사람들의 볼과 눈이며, 코에 고루 이르렀지만, 어제 그늘진 곳엔 새로이 그늘 더욱 짙었다. 오래전 쌓인 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