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기사보기 다음 기사보기 2024-03-29 가내화평 바로가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본문 글씨 키우기 스크롤 이동 상태바 포토뉴스 가내화평 기자명 정기훈 입력 2016.03.04 08:00 댓글 0 다른 공유 찾기 바로가기 본문 글씨 키우기 본문 글씨 줄이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닫기 눈이 쏟아졌고 제법 쌓였다. 2월 말, 언젠가의 벚꽃노래 다시금 음원 순위표를 슬슬 기어오르던 봄 가까운 날이었다. 렛잇고 렛잇고 후렴구만을 겨우 외우고도 신나서 무한반복 노래하는 딸아이 손을 잡고 눈밭을 굴렀다. 눈덩이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뽀드득 소리가 나던 눈은 잘 붙어 금세 커졌다. 나뭇가지 주워 눈코입을 빼뚤 붙이니 그럴듯했다. 아이는 내내 뛰었다. 눈밭이 얼마나 미끄럽고 위험한지를 설명하느라 뒤따르며 진땀을 뺐다. 알게 뭐람, 눈밭에서 아이는 그저 신났다. 어느새 늙은 경비아저씨가 그 길에 빗자루 들고 바빴다. 시골집에 전화 걸어 비닐하우스 안부를 물었다. 늙은 엄마 걱정이 먼저 아니냐고 타박을 들었다. 마당에서 키우는 어린 풍산개 복슬이가 눈밭을 뛰고 구르느라 신났다고 엄마는 전했다. 장독에 오르고 창고를 헤집는 통에 한 대 쥐어박히고 제집에 들었다고도 했다. 일 가신 아버지와는 통화가 안 됐다. 눈 치우느라 바빴다고 나중에야 들었다. 이제 좀 그만 쉬시라고 언젠가 말했는데, 그럼 네가 먹여 살릴 테냐고 어머니가 발끈하시는 통에 본전도 건지질 못했다. 아버지는 그 옛날 군 시절 허리까지 차던 눈 치우던 얘기를 종종 해 주셨는데, 칠순도 훌쩍 넘긴 지금 눈 치우는 일로 아버지는 바빴다. 택배를 받는 일이며 청소와 온갖 사소한 민원처리 따위 아버지의 일터 얘기를 나는 묻지 않았다. 방에 걸린 금색 휘장 화려한 감색 모자와 명찰 달린 점퍼를 보고 짐작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종종 낡은 지갑 열어 고기를 쐈다. 다 늙어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빨간 딱지 선명한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서였다. 나도 따라 한숨 깊었다. 시골집 밤이 깊었다. 해고 문자를 받은 늙은 경비노동자가 삭발했다. 흰 머리칼이 툭툭 바닥에 눈처럼 쌓였다. 무인경비시스템이 대신한단다. 가내 화평을 바란다고도 문자는 전했다. 집 가까운 곳이었다. 봄 가까운 날이었다. 정기훈 photo@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공유 이메일 기사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닫기 기사 댓글 0 댓글 접기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댓글 내용입력 비회원 로그인 이름 비밀번호 댓글 내용입력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회원 로그인 비회원 글쓰기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로그인 옵션 창닫기
눈이 쏟아졌고 제법 쌓였다. 2월 말, 언젠가의 벚꽃노래 다시금 음원 순위표를 슬슬 기어오르던 봄 가까운 날이었다. 렛잇고 렛잇고 후렴구만을 겨우 외우고도 신나서 무한반복 노래하는 딸아이 손을 잡고 눈밭을 굴렀다. 눈덩이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뽀드득 소리가 나던 눈은 잘 붙어 금세 커졌다. 나뭇가지 주워 눈코입을 빼뚤 붙이니 그럴듯했다. 아이는 내내 뛰었다. 눈밭이 얼마나 미끄럽고 위험한지를 설명하느라 뒤따르며 진땀을 뺐다. 알게 뭐람, 눈밭에서 아이는 그저 신났다. 어느새 늙은 경비아저씨가 그 길에 빗자루 들고 바빴다. 시골집에 전화 걸어 비닐하우스 안부를 물었다. 늙은 엄마 걱정이 먼저 아니냐고 타박을 들었다. 마당에서 키우는 어린 풍산개 복슬이가 눈밭을 뛰고 구르느라 신났다고 엄마는 전했다. 장독에 오르고 창고를 헤집는 통에 한 대 쥐어박히고 제집에 들었다고도 했다. 일 가신 아버지와는 통화가 안 됐다. 눈 치우느라 바빴다고 나중에야 들었다. 이제 좀 그만 쉬시라고 언젠가 말했는데, 그럼 네가 먹여 살릴 테냐고 어머니가 발끈하시는 통에 본전도 건지질 못했다. 아버지는 그 옛날 군 시절 허리까지 차던 눈 치우던 얘기를 종종 해 주셨는데, 칠순도 훌쩍 넘긴 지금 눈 치우는 일로 아버지는 바빴다. 택배를 받는 일이며 청소와 온갖 사소한 민원처리 따위 아버지의 일터 얘기를 나는 묻지 않았다. 방에 걸린 금색 휘장 화려한 감색 모자와 명찰 달린 점퍼를 보고 짐작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종종 낡은 지갑 열어 고기를 쐈다. 다 늙어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빨간 딱지 선명한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서였다. 나도 따라 한숨 깊었다. 시골집 밤이 깊었다. 해고 문자를 받은 늙은 경비노동자가 삭발했다. 흰 머리칼이 툭툭 바닥에 눈처럼 쌓였다. 무인경비시스템이 대신한단다. 가내 화평을 바란다고도 문자는 전했다. 집 가까운 곳이었다. 봄 가까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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