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쏟아졌고 제법 쌓였다. 2월 말, 언젠가의 벚꽃노래 다시금 음원 순위표를 슬슬 기어오르던 봄 가까운 날이었다. 렛잇고 렛잇고 후렴구만을 겨우 외우고도 신나서 무한반복 노래하는 딸아이 손을 잡고 눈밭을 굴렀다. 눈덩이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뽀드득 소리가 나던 눈은 잘 붙어 금세 커졌다. 나뭇가지 주워 눈코입을 빼뚤 붙이니 그럴듯했다. 아이는 내내 뛰었다. 눈밭이 얼마나 미끄럽고 위험한지를 설명하느라 뒤따르며 진땀을 뺐다. 알게 뭐람, 눈밭에서 아이는 그저 신났다. 어느새 늙은 경비아저씨가 그 길에 빗자루 들고 바빴다. 시골집에 전화 걸어 비닐하우스 안부를 물었다. 늙은 엄마 걱정이 먼저 아니냐고 타박을 들었다. 마당에서 키우는 어린 풍산개 복슬이가 눈밭을 뛰고 구르느라 신났다고 엄마는 전했다. 장독에 오르고 창고를 헤집는 통에 한 대 쥐어박히고 제집에 들었다고도 했다. 일 가신 아버지와는 통화가 안 됐다. 눈 치우느라 바빴다고 나중에야 들었다. 이제 좀 그만 쉬시라고 언젠가 말했는데, 그럼 네가 먹여 살릴 테냐고 어머니가 발끈하시는 통에 본전도 건지질 못했다. 아버지는 그 옛날 군 시절 허리까지 차던 눈 치우던 얘기를 종종 해 주셨는데, 칠순도 훌쩍 넘긴 지금 눈 치우는 일로 아버지는 바빴다. 택배를 받는 일이며 청소와 온갖 사소한 민원처리 따위 아버지의 일터 얘기를 나는 묻지 않았다. 방에 걸린 금색 휘장 화려한 감색 모자와 명찰 달린 점퍼를 보고 짐작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종종 낡은 지갑 열어 고기를 쐈다. 다 늙어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빨간 딱지 선명한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서였다. 나도 따라 한숨 깊었다. 시골집 밤이 깊었다. 해고 문자를 받은 늙은 경비노동자가 삭발했다. 흰 머리칼이 툭툭 바닥에 눈처럼 쌓였다. 무인경비시스템이 대신한단다. 가내 화평을 바란다고도 문자는 전했다. 집 가까운 곳이었다. 봄 가까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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