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 입은 사람들이 땅을 기었다. 양팔과 두 다리며 이마를 다 낮추느라 행진은 느렸다. 거기 눈길, 흙길, 또 얼음길이었지만 북소리 어김없었다. 꾸물꾸물 나아갔다. 잠시 멈춰 쉰 곳은 어김없이 오랜 싸움터였다. 그 사연 다 듣자니 행진이 또 느렸다. 성탄절 선물 품에 안은 아이 곁을 지났고, 경적 울려 대는 고급승용차 앞을 기었다. 종북세력 척결 농성장을,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 갔다.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정당했다고 법은 끝내 말했다. 공장으로 돌아가자던 사람들이 말없이 공장으로 돌아갔다. 돌고 돌아 굴뚝이다. 우뚝 솟아 멀리서도 선명했다. 공장은 돌아갔다. 연기가 풀풀 쉼 없이 솟았다. 바람 따라 자주 누웠다. 바람이 분명했다. 얘기 좀 하자고 언 입을 떼고 말했다. 눈엣가시 자청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노비였다고 새로 시작하는 어느 사극 광고판에 적혀 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빠고 엄마라고, 길에 나선 노동자들이 말했다. 아들딸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고, 그 앞에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고 싸움에 나선 이유를 곱씹었다. 교섭은 지지부진했고 바람은 날로 차가웠다. 세종로 높은 옥외전광판 좁은 틈에서, 여의도 강바람 드센 그
된바람에 낙엽 날더니, 금방 눈 쏟아진다. 빗자루며 쓰레받기 들고 경비노동자가 일복에 겨웠다. 무 배추 토막 널브러진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적이다가 어느새 잔뜩 쌓인 재활용품 자루를 묶는다. 차곡차곡 폐지를 쌓고, 깨진 유리병 조각을 그러모은다. 언 손 녹이려 들어간 초소엔 택배 상자 가득하다. 내선 전화 시끄럽게 울어댄다. 층간 소음 화풀이가 수화기 너머
주강이는 대법원 앞에서 내내 웃고 활달했다. 이리 뛰고 저리 구르는데 거칠 것이라곤 없었다. 눈빛 맞추면 누구나 이모, 삼촌이다. 거기 모인 누구와도 스스럼없었다. 카메라 앞을 지나면서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잊지 않았다. 평택시 칠괴동 쌍용차 공장 안에서 세발자전거 끌던 시절부터 닦아 온 솜씨다. 파업 현장을 놀이터 삼았고, 어느 거리 집회장소로 소풍 갔다
노랗고 붉은 가을, 비닐하우스에선 온갖 것이 말라 간다. 빨간 고추 고루 말린 자리 빌 새도 없이 벼·수수·참깨·들깨·나물이며 버섯이 두루 바짝 마른다. 가을걷이 언제나처럼 신통치 않았지만 겨울 앞자리 비닐하우스는 발 디딜 곳 없어 그래도 풍성하다. 저기 늦도록 수확 못 한 도시 농부들이 세종로 돌 바닥에
전동 이발기 든 동료는 손이 빨랐다. 망설임 따위 없었고 능숙했다. 구호 새긴 보자기 목에 두른 사람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처분을 기다렸다. 머리칼 날아들었던지 자주 눈을 감았다. 얼마 남지도 않은 머리칼이 흰색 보자기 타고 흘렀다. 빛바랜 머리칼이 뎅겅 잘려 검은 바닥에 뒹굴었다. 민낯을 드러낸 머리가 가을볕에 유난히 반짝거렸다. 앞서 삭발한 이가 뒤따른
겹겹이 쌓아 올린 카트 더미가 무너졌다. 검은 옷 날랜 경찰이 줄줄이 들이닥쳤다. 계산대 옆 바닥에 누워 버티던 노조원들이 하나둘 사지가 들린 채 끌려 나갔다. 비명 잦았고, 울음소리 어지러이 섞였다. 바깥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유리창 두들기며 같이 울었다. 이리저리 맞잡은 손 아래 저기 파업 나선 비정규직 계산원이 아무 말 않고 그 모습을 늦도록 지켜봤다
광화문광장 옆 큰 책방 건물 벽에 나무 그림 붙었다. 하나둘, 이파리 떨구는 나무 아래 산 사람들이 말이 없고 생각에 잠긴다. 고개를 떨군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까르르 웃던 아이들은 떠났다. 구르는 낙엽 보고도 눈물 떨구는 엄마 아빠가 농성장을 떠나지 못한다. 낙엽 빛깔을 닮은 황갈색 담요 싸매고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새파란 하늘 살피던 눈에 노을빛 들어
행복센터에서 일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이들은 고백했다. 주황색 나비 모양 예쁘게 새긴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 유명한 회사 직원은 아니라고 계약서는 말했다. 하청노동자, 때로는 사장이라고도 했다. 나방 처지였다. 건수 찾아 여기저기 날았다. 전봇대를 타고 옥상에 올랐다. 밤에도 휴일에도 전선을 메고 달렸다. 고객님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가차없는 '해피
한 무리 어버이들이 세종로 네거리 옆 인도에 모였다. 왼쪽 가슴에 손 얹고 국기 앞에 맹세했다. 모자 쓴 참전용사는 거수경례를 잊지 않았다. 클라우드컴퓨팅법이며 원격의료법 따위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을 읊었다. 주옥같았다. 주름진 목에 핏대 높이 솟았다. 세월호 특별법 때문이라고 했다. 유가족 선동세력은 지옥 가라고 호통쳤다. 가사 장삼 차림 승려가 팻말
오후 두 시, 사이렌이 요란스레 울었다. 차가 멈췄고 사람이 섰다. 군용차가 세종로 텅 빈 도로를 내달렸다. 민방위 깃발이 바람에 날렸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훈련이라고 사전은 풀이했다. 오후 세 시, 농성하던 유민이 아빠가 천막을 나섰다. 청와대를 향했다. 경찰 무전기가 곳곳에서 요란스레 울었다. 구급차가 느릿느릿 걸음 맞춰 따라붙었다. 봉
광화문광장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은 이정표다. 그 앞 분수는 물놀이 명소다. 아이들은 물 만나 더없이 명랑했다. 그 앞자리 천막에서 아빠가 하염없이 말라 갔다. 명을 건 싸움이었다. 명을 다 살지 못한 딸과의 약속이었다. 참사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애초 가만히 있으라고 누군가 명했다. 사람들은 항명했다. 서명을 받았다. 다 같이 굶었다. 저마다의 사명
박이 내걸렸다. 세월호 유가족이 앞장섰다. 파업 중인 티브로드 노동자가 뒤따랐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이니, 생활임금 쟁취는 소박했지만 절박한 요구였다. 박 대통령과 여당은, 또 원청 사용자는 모르쇠로 버틴다. 짐짓 뒷짐이다. 문전박대가 한결같아 야박했다. 모래주머니 쥔 손에 힘 들어갔다. 이 꽉 깨물고 던졌다. 두들겨라, 언젠가 열릴 것이다. 박 터지게
더위 속 광장에 분수가 솟았고 아이들이 놀았다. 멀찍이 선 엄마들이 스마트폰 들어 사진을 찍었고, 종종 소리쳤다. 넘어질까, 부딪힐까 물가에 아이 내어 둔 엄마 목소리는 다급했다. 마냥 신 난 아이가 젖은 몸으로 한 번씩 엄마 품을 찾아들었다. 그 앞 천막에서 곡기 끊어 말라가던 아빠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여행에 마냥 들떴던 아이는 젖은 몸으로 아빠 품을
파업투쟁 나선 비정규 노동자들이 서울 양재동 자동차회사 앞길에 앉았다. 햇볕이 낮게 들어 모자챙은 눈을 겨우 가리는 데 그쳤다. 나무 그늘은 야박했다. 한낮 열기를 품은 아스팔트는 끈적거렸다. 얼음물은 금방 녹았다. 차별에 맞선 싸움 앞에 더위는 공평했다. 1천500도가 넘는 쇳물을 다루지만 33도 여름 더위가 쉽지 않다. 피서는 누구나의 바람이다. 시원한
줄지어 선 사람들이 투표 차례를 기다렸다. 찬반을 묻는 자리였다. 찬성은 집에 가는 것이라고 앞서 사회자는 설명했다. 찬밥 말고 따뜻한 집 밥이라고 누군가 보탰다. 찬 바닥 농성 40여일. 도시락은 오늘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천장 없는 잠자리는 이제 익숙했지만, 돌아갈 곳이 이들에게도 있었다. 서초동 어느 높다란 빌딩 앞길 검은 아스팔트에 앉아 흰색 종이
저 삼선 실내화는 물에 젖어 질꺽거렸다. 지난밤 천둥과 번개가 요란했고 소나기 오래도록 퍼부었다. 돌침대 삼았던 아스팔트엔 물이 고였다. 배낭과 침낭까지 한 짐 지고 사람들은 앉지 못해 서성거렸다. 노숙농성은 한 달이 가까웠다. 제집인 양 서초동 빌딩 숲길을 헤맸다. 해 지면 잠을 청했고, 해 뜨면 길을 나섰다. 일찍이 본 적 없는 대규모 도심 노숙농성이라
광화문 네거리, 고풍스러운 미술관 옆 길은 특별할 것도 없어 그냥 뚫린 길이다. 오징어구이 파는 노점상 수레 옆으로 정장 입은 사람이 바삐 지났다. 외국 말 쓰는 관광객이, 유모차 앞세운 엄마가 거길 지나 광장 분수대로 향했다. 젊은 연인은 손잡고 보폭 맞춰 한 몸처럼 그 길을 걸었다. 지나가지 못할 이유란 없었으니 시민들은 통행금지 따위 옛말을 떠올릴 필
상복 입은 이들이 앞줄에서 절했다. 삼성 마크가 새겨진 티셔츠 입은 사람들 여럿이 뒷줄에서 따랐다. 가사 장삼 입은 스님이 옆자리 함께했다. 절 한 번에 염주 알 하나를 실에 뀄다. 108번을 엎드렸다. 먼저 간 동료의 넋을 기렸고, 노동조건 개선을 기원했다. 27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 앞이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은 이날 조계종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