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금제 부활 문제로 CJ대한통운과 갈등을 빚고 있는 화물노동자들이 고공농성에 돌입했다.13일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울산지부(지부장 이준서)에 따르면 백상식(43) CJ대한통운택배분회장과 배찬민(47) 조합원이 이날 새벽 서울 영등포구 서울교 앞 30미터 높이 광고탑에 올랐다. 이들은 사측에 손해배상 가압류 철회와 고소·고발 취하, 금전적 페
잿빛 공장 건물 한편 삐죽 솟은 굴뚝에 올라 그는 살았다. 별 헤는 밤이 깊고도 길었다. 북극성처럼 거기 박혀 길잡이 노릇을 오래도록 했다. 내내 꼿꼿했다. 그 아래를 찾아 불온한 덧셈을 이어 가던 사람들은 혹시 부러지진 않을까 염려했다. 기우에 그쳤다. 408일 만이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려 먼지 날리던 공장 터를 적셨다. 꾸역꾸역 모여든 사람들이 고개
불 꺼진 전광판에 현수막이 붙었다. 그건 바람에 휘날려 자주 꼬이고 뒤집혔는데, 구멍 내고 추를 달아 겨우 잡아 뒀다. 그 윗자리 올라 버티던 사람 둘은 현수막 펴는 데에 많은 공을 들였다. 난파선 조각에 매달려 표류하다가 닿은 어느 섬 해변 모래 위에 새긴 조난신호처럼, 현수막에 새긴 요구는 자꾸만 찌그러졌고, 흐릿해졌다. 섬사람들은 날짜 꼬박 세어 가며
승소. 10년 만의 일이었으니 사람들은 즐겁다. 여러 날을 함께한 법률 대리인의 선창에 뒤따른 만세 삼창이 거기 탁 트인 하늘 아래에서 어색할 리 없었다. 그 표정 전하려는 카메라가 몰려 잠시 그곳이 복잡했다지만 이상할 것 없었다. 애써 가로막던 손들이 다만 낯설었다. 정문 향하던 길 내내 따라붙어 대우가 특별했다. 노동조합 조끼를 끝내 문제 삼았다. 원래
언젠가 평택 칠괴동 공장에 역병이 돌았고, 목이 뎅겅 사람들이 잘려 나갔다. 버티던 이들은 끌려 나갔다. 속절없이 떠돌다가는 하나둘, 소득 없이 가난하게 죽어 갔다. 소독약은 듣질 않았다. 방역체계가 없었다. 죽지 않아 살아남은 이들이 여전히 역병과 싸운다. 정부청사 가까운 어느 거리 상가를 지킨다. 열사 정신계승 머리띠 묶고서 정리해고와 노조탄압을 규탄했
노동조합하던 이가 목을 맸다. 상여꾼 자청한 노조 사람들이 저마다 한 짐 메고 서울 낯선 데를 찾아갔다. 상복 차림으로 거기 말끔한 건물 앞을 지켜 섰다. 두건 위로는 까만색 머리띠를 질끈 맸다. 등에는 영정을 멨다. 기자회견 하느라 섰는데 눈이 자주 매웠다. 벌게진 눈을 슬쩍 훔치니 물기 묻어나 굳은살 배긴 손이 반질거렸다. 선소리 매기던 이는 자꾸 목이
서울 어디, 원래는 차 다니던 길에 사람이 들었다. 목소리 높였다. 차벽이 금세 높아 막다른 길이었다. 오도 가도 못했다. 아이가 쪼그려 앉아 길바닥에 글을 남겼다. 하늘나라 간 언니·오빠의 안녕을 바랐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는데, 분필이 자꾸만 뚝뚝 부러졌다. 몽당분필 겨우 쥐고서야 마침표를 찍었다. 풍선 달린 배 그림을 그 아래에
20일 오후 휠체어 탄 장애인과 활동보조인들이 인도를 따라 광화문광장을 향했다. 겹겹이 경찰이 방패 앞세워 막았다. 뒤로는 촘촘히 차벽이 섰다. 왜 막느냐는 질문에 답할 경찰 책임자는 거기 없었다. 지난밤 겹겹이 차벽이 섰던 그 자리다. 물대포 최루액이 흥건했던 광장 앞이다. 갈 길 가겠다며 잠시 밀어 봤지만 꿈쩍할 리 없었다. 바퀴가 자주 헛돌았다. 채증
영정사진 속 단원고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은 애써 슬픔을 억눌렀다. 향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울음을 삼키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세월호 참사 1주기인 16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 위치한 세월호 참사 합동분향소에는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국화꽃을 든 시민들은 영
연대 나선 길이 순탄찮다. 학교는 온통 공사장이었다. 인도는 비좁았고 임시계단은 가팔랐다. 아이유,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허리 절로 굽었다. 고용안정 보장 구호가 그 와중에 버거웠다. 줄지어 꾸역꾸역 걸어 닿은 곳에 벚꽃과 목련과 진달래가 펴 화사했다. 봄옷 한껏 멋을 낸 학생들이 꽃 길 지나며 까르르 웃었고, 능숙하게 셀카를 찍었다. 그 옆자리
현장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고 멀다고, 그 앞 움막 사는 남자가 말했다. 신작로가 반듯했지만 실은 거기 깊은 산골이었다. 겨울이면 가슴팍까지 눈이 쌓이고 삵과 노루가 먹이 찾아 내려와 붐비는 자리란다. 재 너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자는 늙어 낯익은 골짜기에 움막을 지었고 빨간 머리띠를 둘렀다. 보이지도 않는 현장을 바닥 그림 보태 가며 상세히 설명했다.
다시금 해는 길어 봄기운 천지에 무성하다. 땅 아래 웅크려 겨울을 견딘 온갖 잡풀이 삐죽 연녹색 잎을 내민다. 쑥이 쑥쑥 올라온다. 노란색 산수유 꽃망울이 톡톡 터진다. 개나리, 민들레가 저마다 분주하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엄마는 풀밭에 쭈그려 앉아 봄을 캔다. 겨울이 답답했던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그 곁에 뛰논다. 봄 소풍 가잔다. 그리고 돌아오지
제 손톱 깎기는 쉬워도 남의 손톱 자르긴 어렵다. 혹시 다칠까, 손 내밀어 맡겨 두기도 마뜩잖다. 믿음이 우선이다. 한 번에 될 일은 아니다. 저기 무대 오른 대표자들은 다들 제 머리띠 묶는 데엔 선수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 익숙하다. 남의 머리띠 묶는 게 다만 낯설다. 이마 어디쯤이 적당한지, 좌우 균형은 맞는지, 매듭은 얼마나 당겨 묶을지가 모두
남편은 잘렸다. 바람 많이 불던 날 낯선 거리에서, 아내는 남편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뭉텅 잘린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놓질 않았다. 자주 울었다. 까칠까칠한 머리에 얼굴 묻고 꺽꺽거렸다. 울음 눌렀다. 노조 깃발 목에 두르고 앉아 아무 말 없던 남편 눈이 따라 붉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코끝에 매달려 바람 따라 흔들렸다. 툭툭 떨어져 시멘트 바닥을 뒹굴던
숭실대가 노조 탄압과 용역비 착복 의혹이 불거진 업체와 재계약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져지면서 숭실대 청소노동자들이 삭발항의에 나섰다.숭실대 청소노동자 장보아씨 등 2명과 김형수 서울일반노조 위원장이 16일 오후 서울 동작구 숭실대 본관 앞에서 삭발했다. 노조 숭실대분회는 "숭실대 청소와 시설관리를 위탁받은 미환개발이 각종 수당을 체불하고 노조를 탄압
서울 남산 아래 우체국 앞 터에 봉수대가 있다. 밤에는 횃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를 올려 위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시설이다. 요즘 소식은 초고속 인터넷망을 타고 흐르니 그저 유물이다. 상징물이다. 통신비정규 노동자 두 명이 그 뒤편 전광판에 올라 농성한다. 파업 사태 해결을 촉구한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며 비정규직 처지 위급한 소식을 전한다. 불씨 되기를
겨울 그늘진 곳에 농성장을 꾸렸다. 강바람 드센 자리였다. 비닐 덮개 간신히 바람을 막는 정도였으니 노숙농성은 시작부터 고됐다. 100일이 훌쩍 넘어 충분히 길었다. 언젠가 진짜 사장 집 앞을 찾아가 삭발했고, 남산 어드메 높은 빌딩 앞을 찾아가 큰소리 지르기를 끼니 챙기듯 부지런히 이어 갔다. 낯선 구호와 노랫말이 어느덧 입에 착착 붙어 단결투쟁, 결사투
허허벌판에 칼바람 일어 허수아비 춤춘다. 다 거두고 그 들에 이제는 쭉정이도 귀했지만, 덜렁덜렁 바람 따라 쉬지 않고 춤춘다. 굶주린 새가 날아들어 언 땅을 뒤지다가 요란스런 춤바람에 놀라 급히 떠난다. 어둠 짙은 밤을 새워 만석꾼의 땅을 지킨다. 사람 꼴을 닮았다. 기다란 막대기에 밤새 매달렸다. 어슴푸레 동이 텄고 공장 굴뚝이 선명했다. 사람은 저기 굴
겨울, 어느 건설현장이 새벽부터 분주했다. 뚝딱뚝딱 형틀 짜던 목수가 몸을 녹이려 쉼터에 잠시 들었다. 담배 한 개비 꺼내 물었다. 가늘고 긴 것이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았다. 날숨이 한숨처럼 길었다. 연기 따라 자욱했다. 자주 고개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종종 눈을 비볐다. 군더더기 하나 없었으니 그건 오랜 버릇이었다. 이마에 새긴 나이테만큼
저기 나무 높은 자리에 까치가 산다. 거뭇거뭇 두 덩이, 까치집이다. 부지런히 드나들지만 언 땅에 벌레가 귀하다. 감나무에 까치밥 인심은 오래전에 사납다. 까악깍 자주 울었다. 그리고 종종 어디 굴뚝 높은 자리엔 사람이 산다. 까치집 머리를 하고 텃새처럼 머문다. 펜과 카메라 든 기자들이 그 아래를 철새처럼 오갔다. 불 지피던 사람들은 언 땅을 기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