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아 공인노무사(이산노동법률사무소)

개인적인 사정으로 암병동을 자주 드나들며 지난해와 올해를 보냈다. 항암치료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삶이 멈춰버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머리가 빠지고, 온몸이 무기력해지고, 거동조차 힘들어지는 그런 모습 말이다. 하지만 병동에서 마주한 암환자들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그곳은 생각보다 활기차고, 또 생각보다 일상적이다. 낮병동에서 항암을 위해 입원한 사람들 중에는 연차를 쓰고 온 사람, 항암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하는 사람, 병동에 입원해서도 노트북으로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만 할 뿐, 암을 ‘앓으면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럼에도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들에게 일상은 놓을 이유도, 놓을 필요도 없는 어떤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을 일상으로부터 분리되게끔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시선같았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치료보다 더 힘든 것이 ‘치료하며 일상을 영위하는 삶’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라고 했다. 암 진단을 받으면 곧 죽을 사람처럼 대하는 주변 시선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했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소위 ‘암밍아웃’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일하고 있어요, 출근도 해요” 라고 말하면 놀라움과 우려가 돌아왔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암인데 쉬어야지.”

“몸 생각해야지, 일은 나중에 해.”

이 말들 뒤에 깔린 의도는 대체로 선의였지만, 그 선의가 암환자를 더 고립시키는 로직이 되는 듯했다. 암환자는 쉬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 암을 극복하는 과정은 치료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통념은 결국 ‘노동의 장’ 바깥으로 사람을 밀어내 버렸다.

병동에서 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지켜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이 학원비가 걱정돼서, 승진이 눈앞이라서, 동료들에게 미안해서, 혹은 일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지키고 싶어서. 암치료는 그들의 삶에서 방해물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요소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사회는 암환자를 평면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병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시키고, 그들의 삶이 가진 다층적 모습은 지워버렸다.

나는 ‘아파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정확하게 기록해두고 싶다. 암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휴식이 아니다. 일을 할지 휴식을 취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일할 수 있는 조건, 병과 노동을 조율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장치, 그리고 그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 사회적 시선이다. 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이 노동의 장에서 배제하는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

어느 날, 입원 수속을 마치고 노트북을 열어 업무를 마무리하고 회사 직원과 통화하던 암환자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옆 침상의 보호자가 말했다.

“진짜 대단하시네, 암환자인데 이렇게까지 일을…”

그 말을 들은 암환자는 가볍게 목례했지만, 잠시 뒤 커튼을 치며 불쾌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암환자로서 해야 할 ‘정상적인 역할’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순간의 병실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병이 사람의 삶을 제한하는 것은 어쩌면 병 자체가 아니라, 병을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일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노동은 생계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존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질서다.

암 역시 그 삶의 일부일 뿐이다. 어떤 삶의 시간을 선택할지, 어떤 속도로 살아갈지는 환자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그 결정이 존중될 때, 비로소 병과 노동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한 사람의 삶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사실을 병동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섞여 지내면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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