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가 공정거래위원회를 동원한 정부의 건설노조 압박에 제동을 걸었다.
ILO 결사의자유위원회는 노조가 2022년 10월 제기한 진정 건에 대해 지난 7일 우리 정부에 △건설업 고용 불안정성 해소를 위한 노사 대표 협의 시작 △공정거래위의 노조활동 간섭 중단 △노조활동에 대한 체포, 기소, 실형 선고 중단을 권고했다.
“채용 요구 등 교섭 범위 정부가 일방 결정 안 돼”
위원회는 정부의 노조 채용비리 주장을 배척했다. 위원회는 “교섭의 대상은 이해 당사자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당국이 교섭 주제의 범위를 제한하는 조치는 98호 협약과 양립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가 건설산업 노사와 협의해 고용 불안정과 채용 갈등 방지 조치를 취하라고 요청했다.
공정거래위 활용도 제한을 요청했다. 위원회는 “노조 건설기계분과 지부 행위에 대한 조사와 결정을 내림에 있어 공정거래위가 정당한 노조활동에 간섭하지 않도록 정부가 보장할 것을 요청한다”며 “단체교섭 지침을 마련해 단결권 행사와 단체교섭권의 실질적 인정을 위한 명확한 틀이 확립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또 노조활동을 빌미로 형사처벌을 받지 않도록 할 것도 우리 정부에 요청했다. 위원회는 “2023년 1월부터 8월까지 진행된 특별 경찰단속과 관련해 건설노조 조합원 1천700여명이 강요 및 협박 혐의로 소환됐고 시간외수당을 요구하거나 수령한 행위로 공갈 혐의를 받았다는 (정부) 주장을 우려 속에 주목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공갈 및 협박 혐의로 조사를 받던 조합원 양회동씨가 2023년 5월1일 노동절에 분신 자결한 사실에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채용 요구 제한하려 ‘교섭 모두 불법 취급’ 해석
노동부 “우리 정부 ILO협약 위반 인정되지 않아”
정부가 문제 삼은 전임비 등도 열거했다. 위원회는 “자발적 협상 결과로 유급 전임자에 대한 활동비(전임비) 지급이 범죄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며 “건설현장 주 시공업체가 해당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았더라도 현장 내 전임자로 활동하도록 자발적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노조발전기금 요구 등이 불법이라는 주장에 대해 “불법을 주장하나 구체적 설명은 하지 않았다”며 “정부가 건설업에서의 채용 요구 단체교섭을 금지하고자 한 노력이 해당 사항에 대한 교섭 요구 시도를 범죄화하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주목한다”고 설명했다. 무리하게 교섭 범위를 제한하려 시도하면서 이와 관련된 교섭을 모두 불법 취급했다는 의미다.
위원회는 “평화적 단체행동을 조직해 요구 사항을 협상하거나 작업장에서 산업안전보건상 미비점을 고발하겠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정부가 누구도 체포, 기소 또는 형을 선고받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권고문에 대해 우리 정부는 협약 위반이 인정되지 않았고 권고도 요청 수준이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고용노동부는 언론에 배포한 정부 입장자료에서 “노조는 건설현장에 대한 정부 감독 및 제재 조치가 단체교섭을 제한하는 등 ILO 87·98호 협약 위반이라며 진정을 제기했으나 ILO 결사의자유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관련 내용도 결사의 자유를 침해(infringe)했다거나 관련 조치를 촉구(urge)한 게 아니라 건설현장 채용 불안정 문제 해소 조치를 요청(request)한 것”이라고 밝혔다. 기존 정책을 지속 추진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노동부는 “정당한 활동은 적극 보장하되 불법에 대해 엄정 조치한다는 노사법치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며 “결사위가 요청한 내용에 대해 관계부처와 면밀히 검토해 공식 답변을 통해 추가적 사실관계 및 협약이행 노력과 개선 내용을 설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건설노조 “ILO 이사회 의장국이 단칼에 권고 거부”
건설노조는 노동부 입장에 어처구니없다는 입장이다. 노조는 8일 오전 입장문에서 “위원회는 명시적으로 한국 정부에 건설업 고용 불안정성 우려 해소와 공정거래위의 정당한 노조활동 방해 금지 보장, 평화적 단체행동 조직이나 산업안전보건상 문제 신고 언급만으로 체포·기소·형을 선고하지 않도록 보장하라고 요청했다”며 “정부를 상대로 노조가 제소한 사건에서 정부가 노조의 요구를 해소할 방법을 강구하고, 공정거래위가 노조활동에 개입하지 않도록 하고 구속을 하지 말라고 판정한 것인데 엉뚱하게 노조 행위가 정당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힐난했다.
노조는 이어 “정부가 ILO 권고를 실질적으로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라며 “ILO 이사회 의장국으로 선출된 한국 정부가 이렇게 대놓고 권고를 거부하겠다는 말을 쉽게 할 줄 몰랐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심지어 정부가 ILO 결사의자유위에 노조 타임오프 불법행위 사례로 거론한 사건은 건설노조 사건도 아니라며 정부가 위원회 답변 요청에 다른 노조 사건을 갖고 불법행위를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조는 정부에 △노조의 고용요구를 노사 자율 협상하도록 고용입법 수용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권 보장을 위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 △공정거래위의 노조활동 개입 중단 △노조활동 형사처벌에 대해 건설노조와 고 양회동 노조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 유족에게 사과를 촉구했다.
공공운수노조도 성명에서 ILO 87호 결사의 자유 협약을 언급하면서 “딱 한국 정부다운, 참으로 무식하고 어이없는 변명”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87호 협약 8조1항은 “노사단체나 개인이 국내법을 존중해야 한다”고 명시한 데 이어, 2항에서 “국내법은 이 협약에 규정된 보장사항을 저해하거나 저해할 목적으로 적용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공공운수노조는 “공정위와 공정거래법, 그리고 업무개시명령과 같은 국내법을 정부가 87호 협약에 보장된 결사의 자유와 노동조합 권리를 저해하거나 저해할 목적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는 올해 3월 3439호 화물연대본부 사건과 이번 3436호 건설노조 사건에 대한 ILO의 권고를 다시 한번 제대로 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