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한울(서강대 인권실천모임 노고지리)
▲ 김한울(서강대 인권실천모임 노고지리)

2020년, 서강대 청소노동자 연대기구 ‘맑음’이 사람이 없어 멸종했다. 이 가운데 19학번 친구 둘이 분연히 일어나 “노동과 인권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필요해!” 하며 인권실천모임 ‘노고지리’를 만들었다. 복학생으로 학교를 외롭게 어슬렁거리다, 웬 멸종위기종이 부활한 걸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노고지리에 들어갔다. 그러다 노고지리를 만든 친구가 호호체육관 첫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해내고는 나에게 넘겼다. 난, 운동(exercise)하려고 한 건데.

호호체육관은 청소노동자와 노학연대에 관심 있는 학생이 주 1회 만나 함께 팀 스포츠를 하는 사업으로, 우리 학교는 배구 수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나처럼 운동(movement)에 관심 있는 한줌 학우 중 팔 할은 운동(exercise)에 관심이 없는 백면서생이다. 자조적 표현이다. 과장 좀 보태 어떤 집회 행진을 완주하려면 매일 팔벌려뛰기 10개부터 시작해야 할 거다. 그러니 호호체육관은 학생들에게도 딱 필요한 프로그램이었다. 더군다나 만남과 관계없이 당위와 말로만 이어지는 연대는 너무도 끊어지기 쉽지 않은가.

사실 계기가 없어 그렇지, 청소노동자 투쟁을 응원하는 학생들이 많다. 예컨대 이런 일. 조별과제 중 한 학생이 대뜸 “체육관에서 뵀어요” 하며 호호체육관에 대해 물어봤다. 알고 보니 교내 남자농구동아리 학생이었고, 청소노동자의 스포츠권과 노학연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자 체육관 사용이 어려우면 알려 달라, 최대한 돕겠다 내게 얘기해 줬다. 여자농구동아리에게 사업취지를 설명하고 함께하자 제안했더니 우르르 달려와 에이스가 돼 주었다.

▲ 문화연대/ 윤성희
▲ 문화연대/ 윤성희

여경민이라는 친구가 있다. 경민이가 청소노동자와 어떻게 유대감을 쌓았는지 비법을 아래 털어놓았다. 참고로 나의 전략은 흡연자 배려 없는 배구수업을 규탄하며 폐가 터질 것 같다고 옆의 청소노동자에 징징거리기, 체육관 바닥에 누웠다가 일어나라는 소리를 들으며 등짝 맞기 등이었다.

하나만 하면 됐다. 내 마음을 여는 것. 그러나 처음부터 마음을 열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 한 명 한 명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시작이다. 서먹한 사이일지라도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당신이 이 공을 받으라고 외친 다음 공을 던진다. 저 사람은 내 공이 과연 제대로 받을 수 있을 만큼 잘 날아올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공을 쳐다본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나의 마음이 열리고, 흐릿한 정체성보다 저마다의 성격이 보인다.

‘저 선생님은 동작이 크지 않은데 공을 정확하게 치시는구나’ ‘저 선생님은 칭찬을 쑥스러워하시지만 내심 좋아하시는 것 같다’ ‘저 선생님은 학생들을 너무너무 예뻐하셔서 뭐든 도와주고 해주려고 하시네’

중년·여성·청소노동자 외에 저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점을 포착한 뒤에는 눈이 마주쳤을 때 어색하게 눈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진심으로 반가워하고 조금은 쑥스러워하면서 안녕함을 묻고 날씨·학교생활 따위의 소박하고 시시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청소노동자들이 나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도 내가 마음을 여는 과정과 비슷했다. 나는 운동을 정말 못한다. 당연히 배구도 못했다. 내가 만난 학교의 노동자들은 학생들을 우쭈쭈하는 마음을 다들 품고 있었다. 내가 무릎을 제대로 못 굽혀서 끙끙대는 것을 보고는 측은지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공을 칠 수 있는지 알려줬다. 점차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기량을 칭찬하고 응원하는 관계가 됐다. 호호체육관 속 연대의 방법은 결국 관계 만들기라고 볼 수 있다.

▲ 여경민(서강대학교 인권실천모임 노고지리)
▲ 여경민(서강대 인권실천모임 노고지리)

“응급실 같은 연대 말고 가정의학과 같은 연대를 해보고 싶다”는 문화연대 박이현 활동가의 말이 생각난다. 연대는 서로 얼굴도 안 보다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공간을 같이 쓰더라도 단 10분도 대화해 본 적 없으면서 서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식하기는 어렵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몰랐던 면모는 뭔지 발견하는 순간들이 이어져 우리가 연결돼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한편 화목하고도 끈끈한 결속을 자랑하는 청소노동자들을 보며, 저 모습을 너무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호호체육관은 노동자가 학생에 스승이 되는 노학교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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