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와이퍼가 밝힌 청산 개시일을 사흘 앞둔 지난 6일 정오 경기도 안산시에 위치한 한국와이퍼 공장은 점심시간이 한창이었다. 황은숙 금속노조 한국와이퍼분회 부분회장이 소고기뭇국을 그릇에 담아 배식하고, 밥과 국을 두 손에 든 조합원들은 박스와 포장지를 겹겹이 쌓아 만든 식탁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제품을 나르는 데 사용하던 접이식 카트는 의자로 변신했다. 김·김치·파김치·고추장아찌·진미채 볶음 등이 식탁 위에 어지러이 놓였다. 관심은 ‘정남 언니네’ 김치에 쏠렸다.
“맛있네. 이 김치 언니가 한 거야? 어떻게 한 거야?”
“묻지마. 다쳐.”
동료가 묻자 정남 언니 입에서 장난스런 답변이 돌아왔다. 같이 있던 이들의 웃음이 터졌다. “저 언니 음식 안 해, 언니 엄마가 한 거야.” 동료가 고자질했다.
“김치 맛있겠다.” 최윤미 분회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최 분회장은 지난해 12월20일 44일간 곡기를 끊어 죽으로 보식 중이다. 아직 매운 음식을 먹을 몸이 못 된다. “조금 씻어 줄까? 재밌게 먹으려고 김치 대가리만 잘라 왔어.” 김치를 손으로 찢는 손동작을 흉내 내며 정남 언니가 말했다. 최 분회장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집에서 싸 온 야채죽과 미역국을 먹는 최 분회장에게 정남 언니는 “(다 나으면) 다음에 말해. 내가 해 줄게”라고 약속했다.
한국와이퍼 노동자가 회사에 출근해 숙식을 해결한 지 9일로 일주일이 지났다. 회사의 일방적 청산 통보 철회를 요구하는 투쟁이 장기화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200여명의 동료는 서로가 기댈 곳이자 쉴 곳이었다. 지난 6일 오후 <매일노동뉴스>가 한국와이퍼 공장을 찾았다. 청산을 이유로 같은날 난방을 중단한 탓에 공장에는 한기가 가득했지만 사람으로 북적인 곳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교섭 상황은 9일 추가 취재했다.
지난 2일부터 공장에서 생활
3조2교대로 밤낮 회사 지켜
“돈 아껴야 하니깐 밥이랑 국만 사오고 밑반찬은 언니들이 십시일반하고 있어요.”
최윤미 분회장이 설명했다. 아침은 컵라면과 햇반으로 간단히 떼운다. 분회는 이달 2일부터 회사를 지키고 있다. 전체 조합원은 매일 오전 10시 회사에 출근해 정오까지 출근투쟁을 진행한다. 이어 오후조는 정오부터 밤 10시까지, 야간조는 밤 10시~다음날 오전 10시까지 공장을 지킨다. 2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장기 투쟁에도 지치지 않게 3조2교대제 투쟁이란 묘안을 냈다.
덕분일까. 조합원들의 얼굴에 지친 기색은 크지 않았다. 돌아가지 않는 공장 안에 머무는 시간은 ‘공정’이란 투명 칸막이 탓에 말을 나눠 본 적 없는 동료와 이야기하고, 속내를 털어놓는 계기가 됐다.
힘든 건 추위다. “이동식 난로 같은 것을 틀어도 결국은 춥더라고요.” “추운 게 제일 문제예요. 공기가 차니깐 낮에도 춥고, 발도 시리고….” 지내면서 어려운 점을 묻자 조합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최윤미 분회장이 “그런데 회사가 (청산을 위해) 보일러를 해지해야 한다고 6일부터 히터를 끊겠다고 했다”며 “이미 끊어졌나 보다. 바람이 차다”고 덧붙였다.
식탁이고, 의자고 필요한 건 만들어 사용한다. 못 만드는 게 없다. “이쪽 잡아.” 한 조합원이 박스 아랫단을 잡자, 다른 조합원이 박스 윗단을 잘랐다. 작업대 위에 쌓아 둔 반찬통이 보기 싫어 자체 수납함을 만든 것이다. “우리 언니들 못 만드는 게 없어. 노조 사무실에 냉장고가 있기는 한데, 겨울이라서 반찬이 여기에 둬도 안 쉬어요. 뭐든 나쁜 게 있으면 좋은 게 있고 그런 거죠.” 최 분회장이 유쾌하게 이야기했다.
“휴가도 편히 못 냈던 과거
노조 생긴 뒤에야 ‘좀 다닐 만했는데’”
가벼운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시종일관 유쾌했던 언니들의 눈물샘은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고장이 났다.
“제가 작은아들이 두 살 때 들어왔거든요. 아이가 일곱 살 때 희귀질환에 걸려 아파서 정말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래도 꾸준히 지금까지 해 온 건데 희망이었던 회사가 이렇게 되니 너무 슬픈 거죠. 이 회사가 희망이었는데. 노조 생기고 복지가 좀 좋아지고 이제야 계속 다닐만 했는데.”
이미옥(46)씨는 2013년 생활정보신문 교차로에서 구인공고를 보고 한국와이퍼에 계약직으로 입사해 정규직이 됐다. 2018년 노조가 생긴 뒤 바뀐 게 무엇이냐고 묻자 “아이가 아프다고 말하고 일하다 중간에 갈 수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김미화(53)씨도 서러웠던 기억을 꺼냈다. “나도 우리 애 아파서, 병원 들렸다가 두 시간 정도 늦게 출근하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다 큰 애가 왜 다치느냐’고 하더라고요. 엄청 서러웠어요. 그래서 결국에 울면서 저는 출근하고 애기는 다른 엄마한테 부탁하고…. 그렇게 해서 지켜 낸 직장이에요.”
미화씨는 2014년 동네 친구 소개로 한국와이퍼에 입사하게 됐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3개월 동안 한 번을 안 쉬었다. 동료의 공석을 메워 주는 지원 업무, 잔업도 마다하지 않아서일까. 남들보다 빨리 정규직이 됐다. “딸내미가 어느날 친구 엄마한테 가서 그랬대요. ‘저는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요’라고요. 같이 사는데 애 자면 들어가고, 눈 뜨면 나오고 하니깐. 그 정도로 애가 제 얼굴을 못 본 거예요.”
옆에 있던 동료가 비슷한 기억을 떠올렸다. 이선령(48)씨는 “저는 주말 부부인데, 작은딸이 언제는 한번 ‘나는 엄마도 없는 것 같고, 아빠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며 “그 딸이 이제 대학교에 들어간다”고 전했다. 이씨는 “(제가) 한참 돈 벌어야 할 나이인데, 이제 (회사가 주는) 학자금 좀 받아야 하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기어 다니던 아이가 두 발로 서서 걷고, 천지분간 못하던 개구쟁이 초등학생을 어엿한 성인으로 키우는 동안 엄마이자 가장이던 노동자들은 회사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견뎠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일방적인 청산 통보였다.
휴가 계획 고민하던 찰나 통보받은 청산 계획
한국와이퍼 노동자들은 2021년 9월 한국와이퍼와 총고용보장합의서를 쓸 때만 해도 회사의 일방적인 청산은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와이퍼는 “와이퍼 이외 신규 아이템을 확보해 고용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고, 모기업인 덴소코리아와 관계사 덴소와이퍼시스템은 연대책임자로 합의를 보증했다.
“휴가를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차에 반장이 (작업장에) 올라오더니, 식당으로 직원들을 소집해 청산을 발표했어요.”
선령씨가 청산 통보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해 8월7일의 일이다. 미화씨는 “총고용보장합의서 쓴 뒤에 이제 열심히 일만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회사는 청산 통보에 이어 조기퇴직 시행을 알렸다. ‘돈 줄 테니 나가라’는 것이다. 일부 노동자가 응하긴 했지만 아직도 200명이 넘는 노동자는 투쟁 중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버티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묻자, 망설임 없이 “우리 분회장님”이란 대답이 튀어나왔다. 선령씨의 말에 주변 동료들이 호응했다. 최윤미 분회장이 44일 동안 단식농성을 한 이야기로 이어지자 선령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언니들이 (단식) 중간에 만나는데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다 도망다니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깐 눈물이 나서 도망다녔다고 하더라고요.”
최윤미 분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선령씨는 “(단식 중에) 매일 사진을 찍어 보여주는데, 얼굴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여위는 게 눈에 보여서 그랬다”고 말했다. 미화씨는 “(단식 중) 힘들 텐데 항상 웃는 모습으로 있으니깐 그게 정말 마음이 아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단식 중단에 교섭 제안하더니, 모회사 ‘나 몰라라’
최윤미 분회장은 지난해 12월21일 단식을 중단했다. 한국와이퍼와 덴소코리아·덴소와이퍼시스템이 함께 교섭자리에 나오겠다고 밝히면서다. 하지만 지난 5일 오전 비공개로 1시간40분가량 진행된 교섭은 소득 없이 끝났다.
최 분회장은 “교섭을 시작하자마자 (회사쪽) 첫 이야기가 덴소코리아와 덴소와이퍼시스템이 들어오지 않겠다며, 한국와이퍼 (노사) 당사자끼리 논의하라는 이야기였다”고 전했다. 교섭 이후 노조가 전향적인 입장을 재차 촉구하자 덴소코리아는 6일 “당사는 KWB(한국와이퍼)에 대한 청산 결정 및 청산으로 인한 KWB 소속 종업원들의 고용 문제에 관여할 어떤 권한이나 책임이 없다”고 공문을 보냈다. 덴소와이퍼시스템도 같은날 “KWB 회사청산에 따라 진행될 업무는 KWB 대표이사 및 경영진이 대응할 사항”이라고 밝혔다.
최 분회장은 “단식이 길어지고, 고용노동부 압박에 못 이겨 교섭에 나오더니 뒤통수를 제대로 쳤다”고 분개했다.
한국와이퍼 노사는 매주 화요일 교섭을 진행 중인데 이렇다 할 진전은 없다. 한국와이퍼쪽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퇴거할 것을 요청하고, 업무방해 금지 등 가처분신청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노조에 밝힌 상태다.
일터에서 쫓겨나는 노동자에게 현재 플랜 비는 없다. 이들의 소망은 간단하다. 삶의 근간이자 희망이었던 일터를 지키는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