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16일  총파업 대회 후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 금융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16일  총파업 대회 후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정오에 가까운 시간, 어제까지 선선했던 날씨는 얄궂게도 섭씨 30도를 넘겼다. 열기 가득한 서울시내를 은행원과 금융공공기관 노동자들이 걸었다. 연신 손부채를 부쳤다. 규모가 큰 데다 좁고 긴 행렬 탓에 행진은 느릿했다. 노동자들의 행렬이 서울 세종대로에서 남영역 인근까지 이어졌다. 수만명의 금융노조(위원장 박홍배) 조합원은 그렇게 서울시내 주요 거리에서 금융 공공성 강화와 정당한 보상을 외쳤다.

산은 조합원 “지역균형발전 없는 부산 이전”

“한국산업은행의 본점 부산 이전은 정치적 목적에서 제기돼 제대로 된 토론도 없이 추진된 잘못된 정책입니다. 지역균형발전 철학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노동자로서 갑작스레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는 어려움도 묵살됐습니다. 이를 막아 내기 위해 파업에 동참했습니다.”

노조 산업은행지부 3년차 조합원 김경훈(가명)씨 발언은 똑부러졌다. 이날 가장 많은 조합원이 참여한 산업은행지부는 가장 선두에서 행진을 이끌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부터 강조한 산은 부산 이전을 저지하겠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시중은행 조합원은 일각의 집중적인 ‘귀족노동자’ 틀 짓기에 반발해 참여를 결심했다고 했다. 6년차 KEB하나은행 조합원 윤영은(가명)씨는 “평균 연봉이 다른 산업보다 높으면 파업을 못하도록 법으로 정했느냐”며 “조선하청 노동자가 파업하면 떼쓴다고 하고, 은행원이 파업하면 귀족이라고 하면 누가 파업을 할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언론의 ‘연봉 1억 귀족노동자 파업’을 비판한 것이다.

이날 금융노조가 추산한 파업 참가 인원은 약 3만명이다. 파업 직전 일부 지부가 간부파업 형태를 결의하면서 일반 조합원의 파업 참여가 저조할 것이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실제 일부 지부 위원장은 이런 참여 열기에 직접적인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김형선 노조 IBK기업은행지부 위원장은 이날 투쟁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 “보수언론의 분열과 귀족노동자라는 틀 짓기를 뚫고 이 광장을 메운 노조 조합원이 자랑스럽다”며 “소속과 지역과 정치적 지향을 넘어 금융 공공성을 지키자”고 외쳤다. 노조는 당초 집회를 2만명 규모로 신고했다.

경찰 수군수군 “은행원 파업이라 분위기 달라”

경찰 추산 인원은 절반 이하다. 경찰은 이날 집회 참가 인원을 1만3천명으로 추산했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조합원 대비 13.6%가 파업에 참여했다. 17개 은행 조합원의 참여는 9.4%로 집계했다. 9천807명이다. 특히 금감원은 5대 은행 파업 참여율은 0.8% 수준이라며 애써 파업 영향를 축소했다.

파업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한국은행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행진하는 노동자를 지켜보던 일부 시민은 “은행원이 파업을 해 교통에 불편을 겪는다”며 불평했다. 한편 시청 인근에서는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금융노조 파업은 정당하다”며 노동자를 응원하기도 했다.

이번 노조의 가두행진은 노조의 오랜 파업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파업과 행진을 관리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도 “이번 파업은 은행원 파업이라 나이대가 낮고 분위기도 제조산업 파업과는 다르다”고 한담을 나눌 정도다. 이날 파업에는 서울 종로와 용산 등 25개 경찰서에서 경찰병력 1천500명이 투입됐다.

행진 분위기는 얼핏 촛불집회를 연상하게 했다. 은행처럼 전국 각지에 지점을 둔 지부의 조합원들은 신입 채용 이후 다른 지점 근무로 발령이 나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과 반가움을 나누기도 했다.

노조는 당초 세종대로에서 용산 대통령실 인근 삼각지역까지 행진해 마무리 집회를 할 계획이었으나 예상보다 참여 인원이 많고 행진이 다소 더뎌 서울시내 각지에서 마무리 집회를 여는 것으로 변경했다.

▲ 금융노조 조합원들이 16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에서 연 총파업 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기훈 기자>
▲ 금융노조 조합원들이 16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에서 연 총파업 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기훈 기자>

가파른 점포폐쇄, 부의 재벌 독점 엄혹한 미래

다소 밝은 행진 분위기와 달리 금융산업이 처한 현실은 엄혹하다. 금융 전문가들이 금융소외계층의 피해를 우려하고 있음에도 은행들은 2020년 304곳을 시작으로 매년 300곳 이상의 점포를 폐쇄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12조원에 달하는 당기순이익을 거두고도 노동자 임금 상승률은 0.9%를 고수하다 파업 직전에서야 2.4%로 올렸다.

노조는 파업 직전 열린 대대표교섭에서 물가 상승률 수준의 임금인상률 5.2%와 주 36시간 시범 운용 같은 수정된 내용을 제안했지만 사용자쪽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조가 정부에 점포폐쇄 가이드라인 강화 같은 내용도 촉구했지만 이 역시 묵살됐다.

이 때문에 이날 파업 단상에 오른 노동계 관계자들은 정부와 자본에 화살을 겨눴다. 박홍배 위원장은 “10만 금융노동자 파업은 사람을 살리고 금융 공공성을 지키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파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공공기관을 민영화하고 노동개악을 추진하는 정권과 점포·고용을 줄이고 주주 배당에 목숨을 건 금융사용자에 맞서 공공성을 사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윤석열 정부는 주 52시간제를 무너뜨리고 무한경쟁의 성과급제를 도입하는 걸 노동개혁이라고 호도하고 있다”며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노동·금융·교육·공공부문에서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고 사회공공성을 훼손한 행위는 역사와 국민의 심판을 받았고, 그 심판 선두에 분노한 노동자 투쟁대오가 있었다”고 밝혔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양대 노총은 윤석열 정부의 무능력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이자 코로나19를 기회 삼아 배를 불린 재벌과 자본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이들의 폭주를 막는 것은 오로지 노조뿐이며, 노동자 민중의 권리와 생존을 위해 작은 차이에 연연하지 않고 어떤 잡음도 뛰어넘어 금융노조 파업이 양대 노총 단결의 마중물이 되도록 함께 투쟁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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