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지난 3월21일 전경련·경총 등의 대표들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 만남이 있었다. 재벌 총수이기도 한 대표들은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 유연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벌률(중대재해처벌법) 보완 입법 같은 노동 관련 건의를 많이 했다고 한다.

노동은 기업 관점에서도 핵심 쟁점이다. 모든 걸 다 만들어도 노동자만큼은 기업이 만들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재벌 총수들이 노동을 다루는 방식이 고루하다. 고등교육 혁신, 정부의 연구개발 인프라, 숙련 증진을 위한 직업교육 같은 ‘인적 자본’ 축적을 위한 제언은 없었다. 오로지 ‘저임금·고강도·장시간 노동’에 관련된 내용뿐이었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한다느니, 앞으로는 인적 자본이 핵심이라느니 떠들지만 재벌들은 정작 정부 정책과 직접 관련된 자리에서는 여지없이 노동을 쥐어짜는 수단만 강조한다.

대통령과 재벌의 관계는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 경제에 치명적 약점이다. 양쪽이 서로의 퇴행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역사적 이유와 제도적 이유가 있다. 필자는 이를 졸저 <대통령의 숙제>에서 분석했다. 먼저 역사적 이유부터 살펴보자.

모두가 알 듯, 한국의 재벌은 정경유착으로 성장했다. 다만 정경유착의 형태는 시대마다 달랐다. 1기는 이승만 시대로 뇌물과 축재가 경제활동의 8할 이상을 차지하던 시기다. 뇌물을 주고 적산과 원조물자를 차지하는 게임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1세대 재벌이 됐다. 2기는 박정희부터 노태우까지로 대통령과 재벌이 제도적 특혜와 통치자금을 교환하던 시기다. 박정희는 군사적 목적으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했고, 정권의 목적에 복무하는 재벌들이 정책자금을 독차지해 기업 규모를 키웠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통치자금을 얻고 재벌의 시장독점과 정책금융 독점을 도왔다.

정경유착 3기는 민주화 이후로 재벌의 금권이 선거 정치를 이용해 대통령 권력을 역으로 포획하던 시기다. 민주화 이후 정치는 엄청난 규모의 선거자금이 필요했다. 그런데 뭉칫돈을 한 번에 얻을 구석이 재벌 총수밖에 없었다. 재벌의 선거자금을 얻기 위해 정치인들은 특혜를 팔아야 했다. 대통령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측근까지 모두 정치자금을 얻기 위해 재벌의 문을 두드렸다. 김영삼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본인 또는 가족과 측근이 뇌물을 받아 구속됐다. 재벌들은 규제개혁이란 이름으로 특혜를 누렸고, 특히 경영권 세습이나 내부거래 관련 불법행위 처벌을 정권의 협조 또는 묵인으로 피해갈 수 있었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 이후를 4기로 규정한다. 이전과 같은 대규모 뇌물과 특혜 제공은 사라졌다. 그런데 아예 재벌개혁론 자체가 사라졌다. 장하성·김상조 같은 재벌개혁의 최전선에 있던 학자들이 문재인 정부 요직에 대거 진입했지만, 놀랍게도 이들은 재벌개혁의 불필요성을 역설했다. 시민단체들도 조용해졌다. 담론이 사라지자 문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자주 재벌 총수들을 만났고, 그들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사면됐고, 다양한 편법을 통해 재벌들의 경영권 세습도 별 탈 없이 이뤄졌다. 사회적 문제제기도 크지 않았다. 재벌들에게 이번 4기 정경유착의 최대 성과는 재벌개혁론 자체를 없애 버려 사회적 감시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대통령과 재벌의 관계를 제도적 차원에서도 살펴보자. 의원내각제보다 대통령제는 정부 권력과 금권 간 거래에 유리하다. 의원내각제 같은 입법부 우위의 정부는 법을 근거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한국의 대통령제 같은 행정부 우위의 정부는 입법 없이도 재량에 따라 움직이는 폭이 넓다. 금권을 가진 재벌은 대통령제를 선호한다. 국회의원 다수를 포획해야 하는 입법부 우위 정부보다 대통령 한 명만 포획하면 되는 행정부 우위 정부가 비용이 싸게 먹혀서다. 더군다나 그 대통령이 ‘제왕적’이라 불리는 무소불위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대통령은 제왕적 권력을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재벌의 금권이 필요하다. 요컨대 재벌에게 제왕적 대통령제는 정부를 포획하는 가성비 좋은 제도다. 정부의 왕과 경제의 왕 사이 일대일 거래가 이뤄지니 말이다.

그렇다면 재벌은 왜 권력을 포획하는 데 관심이 많은가? 문어발식 계열사를 갖추고 경영권을 통해 사익을 챙기는 게 재벌 가문의 전통적 축재 방법이기 때문이다. 계열사 임원에 이름을 올려놓고 높은 보수를 받아 챙기고, 자신이 소유한 기업을 내부거래에 끼워 넣어 통행세를 받는 일은 익히 알려져 있다. 경영권을 편법으로 세습하는 것도 권력을 포획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다. 적은 지분으로 대규모 기업집단을 통째로 소유하는 재벌 가문은 원칙대로 상속을 진행할 경우 지배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 정부가 꼼수를 묵인해 줘야 세습도 가능하다.

물론 이런 재벌구조는 기업 제도 측면에서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상당한 기업 자원이 재벌 가문의 사익을 위해 이용되기 때문이다. 세계적 선도 기업이 되는 데 문어발식 사업이 도움이 될 리도 없다.

윤석열 당선자가 강조한 자유시장 관점에서도 재벌은 득보다 실이 많다. 자유시장이란 공정한 경쟁과 소유권 보호를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재벌이 과연 그러한가? 재벌은 독점의 대명사다. 부당한 원하청 거래로 경쟁도 제한한다. 소유권 측면에서도 법인의 부를 사익으로 편취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자유시장의 ‘적’이 바로 재벌의 구태라고 할 수 있다.

재벌들은 자유시장의 노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앞장서서 왜곡해 왔다. 노동력은 일반 상품과 달리 ‘시민권’을 가진 인간의 자원이다. 그래서 재해를 입지 않을 권리가 있고, 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정부는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을 일반 상품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런데 재벌들은 이런 제약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제약’ 없이 기업을 경영하는 게 자유시장이 아니다. 인간 노동력이라는 매우 특수한 자원을 이용할 때 발생하는 제약을 인정한 전제에서 경영하는 게 자유시장의 원리다.

2020년대 한국 경제는 코로나 상처를 치유하고,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인구 감소·고령화 국면에 대응해야 한다. 제왕적 권력과 재벌의 조합은 이런 역동적 변화에 효율적이지 않다. 새 정부는 이 둘을 동시에 개혁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구태의연한 정부와 재벌의 노동개혁 거래는 최악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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