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의 국민연금 개혁정책을 두고 노동운동 안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심 후보가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보험료 인상을 공약하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노후소득 보장 방안이 먼저라며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연금기금의 지속가능성과 충분한 노후소득 보장 중 무엇이 먼저냐는 논쟁은 꽤 오랫동안 반복된 것으로 새로운 건 아니다. 다만 대선을 앞두고 한 번쯤 반드시 짚어야 하는 쟁점이긴 하다. 국민연금 수령자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점점 더 첨예해지므로 문제를 미룰수록 해결은 어려워진다.

핵심 쟁점은 국민연금이 책임져야 할 노후소득 보장이 어디까지냐는 것이다. 기금의 수입만큼인가, 아니면 규범적으로 정한 소득보장 목표까지인가. 나는 전자를 국민연금에 대한 유한책임론, 후자를 무한책임론으로 부르겠다. 유한책임론에서는 연금기금의 지속가능성이 먼저 문제가 되고, 무한책임론에서는 모자란 기금을 누가 얼마큼 채워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는 일할 때 낸 돈의 두 배 정도를 노후에 받는다. 경제성장 둔화에 인구 감소까지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수입·지출 체계는 당연히 유지될 수 없다. 유한책임론 관점에서는 더 내는 방식이든, 덜 받든 방식이든, 아니면 둘을 합한 것이든, 개혁이 필수적이다. 기금이 사라지면 연금급여 지급이 불가능한데, 이는 먼저 연금을 받은 사람이 뒤에 받을 사람에게 사기를 치는 꼴이 된다. 무한책임론 관점에서는 경제와 인구 사정은 ‘조건’일 뿐 목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현재 40%인 소득대체율을 더 높이고, 부족한 기금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부자 증세를 하든, 국채를 발행하든, 자금조달 방법은 그 다음 문제다.

양쪽 견해 차이는 국민연금의 장기 재정전망에 관한 신뢰 여부에서도 갈린다. 국민연금공단을 비롯해 다수의 정부기관은 70년간의 재정추계를 발표한다. 소득의 9%를 보험료로 내고 40%를 연금급여로 받는 체계에서는 2050년대 중반에 기금이 고갈된다. 2060년대부터 국내총생산(GDP)의 5~6%가 외부에서 조달돼야 한다. 정부가 책임진다면 재정의 20% 내외가 투입돼야 하고, 보험료 납부자가 책임진다면 일하는 사람 1명이 1.3명의 연금 수급자를 책임져야 한다. 유한책임론 관점에서 이런 장기재정 전망은 제도 붕괴와 다름없다. 연금이 국가재정 파탄의 불씨가 되든지, 아니면 후세대를 갈취하는 제도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반면 무한책임론은 장기재정 전망 추계 자체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5년 내외 경기전망도 못 하는데 어떻게 70년을 전망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 노후소득은 복지정책의 일환이다. 정부가 예산 추이를 70년간 예상하지 않는 것처럼 국민연금도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유한책임론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무한책임론은 실현될 수도 없고 되레 연금을 매개로 한 지대 추구를 부추길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우선 모든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을 국민연금을 통해 이룬다는 발상부터 문제가 있다. 공적연금은 서유럽에서 20세기 초중반에 설계된 제도다. 1인당 소득과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인구 다수가 중산층으로 수렴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딱 이런 상황에 최적화된 노후소득 보장제도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반대다. 경제와 인구가 정체·하락 중이고, 중산층이 확대하기는커녕 해체되고 있다. 국민연금은 현재 보험료체계로는 지속불가능할뿐더러, 연금지출을 정부재정으로 지원할 때도 고소득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쓰는 꼴이 돼 버린다.

무한책임론이 상상하는 정부도 문제가 있다. 노후복지를 책임지는 정부이기 이전에 국민에게 사기를 치는 정부가 되기 때문이다. 한번 이런 상상을 해보자. 30년 만기 장기적금이 있다 치자. 처음 가입할 때는 만기 때 원금의 두 배를 주겠다고 약속하더니, 한 10년쯤 지나서 “20년 후에 저희 은행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어요. 그때 일을 누가 알겠어요?”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더군다나 이런 적금을 법으로 강제로 가입하도록 했다면 또 어떻겠는가. 아마도 가입자들이 은행으로 쳐들어가 난리를 쳐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국민연금 장기재정 추계 결과를 무시하는 건 정부가 저런 일을 벌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정부가 무조건 국민연금을 책임진다는 것은 정의롭지도 못하다. 정부재정의 20% 이상을 쏟아야 하는데, 그 재정수입이 다른 복지의 축소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그만큼 세금을 더 걷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금은 누가 내겠는가? 기업에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다면, 한국의 100대 대기업 순이익 전부를 노후연금으로 거둬야 한다. 최소한의 투자자금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일하는 세대에게 거두면 보험료가 지금보다 네다섯 배 증가한다. 이런 식이면 사회 전체가 고령 인구 부양만을 위해서 일하는 꼴이 되고 만다. 저성장과 인구 감소를 겪을 세대에게 고성장과 인구 증가를 거쳐 온 세대가 부담을 떠넘기는 것이다. 정말로 부정의한 일이다.

나는 국민연금은 연금가입자 책임하에서 연금급여 지출이 이뤄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금기금이 정부 지원 없이도 스스로 유지될 수 있도록 보험료와 소득대체율을 정해야 할 것이다. 고성장, 인구 증가, 중산층 시대에 만들어진 국민연금은 어떤 식으로 개혁해도 현재와 같은 저성장·고령화·불평등 시대의 국민 모두를 위한 노후소득 보장 제도가 될 수 없다. 이점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무한책임이 만들 무책임보단, 유한책임이 보장하는 작은 책임이 도덕적으로도 낫다. 끔찍한 소득 격차와 상대적 빈곤 증가에 맞춰 정부는 취약계층에 대한 노후복지 지원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기초연금 같은 현금 소득, 노인 건강, 요양 돌봄 등을 강화하고 사각지대도 없애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동료 시민에게 더 많은 도움이 갈 수 있도록, 자신의 책임하에 노후를 설계할 수 있는 시민이 연대하자.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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