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대통령이 해결하라!” “대통령, 만납시다!”

떠올려 보면 지난 몇 년간 대통령을 상대로 외쳤던 집회 구호가 정말로 많았다. 사업장 단위 노사관계부터 국회 소관 법 개정과 법원 재판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노동 문제를 대통령에게 해결하라 요구했다. 요구가 이렇다 보니 거리집회를 해도 도착지는 항상 청와대 언저리였다. 청와대 앞 1인 시위도 매우 많았다.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의 피켓부터 개인적 사연을 담은 대자보까지. 많을 때는 수십 명이 각자의 요구를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뭐랄까. 후대에 한번쯤 시대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교과서에 실릴 법한 풍경이었다.

대통령에게 요구하고 대통령이 해결하라는 식의 요구가 급증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두 가지 특징과 관련이 있다. 첫째, 문재인 정부는 촛불집회로 탄생했다. 그만큼 거리의 요구나 여론 동향에 민감했다. 둘째, 대통령 주도의 개혁을 추구했다.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적폐청산으로 보수의 힘을 약화하려 했다. 적폐청산의 선봉은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일 수밖에 없었다.

여론과 거리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제왕적 힘을 마음껏 사용하는 대통령. 보수정부에서 고생한 노동운동이 개혁과제를 의탁하고 싶은 건 어쩌면 인지상정이라 하겠다. 노동운동은 9년 가까이 “퇴진하라” “규탄한다”만 외쳤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이후 “만나자” “해결하라”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5년의 결과는 어떨까? 노동조합의 양적 성장에서 보면 성과가 있었다. 노조 조직률은 2016년 10.3%에서 2020년 14.2%로 상승했다. 30년 가까이 200만명을 넘지 못하던 조합원수도 280만명으로 증가했다. 문재인 정부 이후 노조가입 문턱은 상당히 낮아진 덕분이었다.

질적으로는 어떨까? 기업별 교섭의 한계를 벗어났는지, 작은 사업장 또는 비정규직 노조 조직률이 증가했는지를 질적 성장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초기업적 교섭에 관해서는 별다른 개선이 보고되지 않는다. 경제사회발전노동위원회(경사노위)부터 코로나19 사회적 대화까지 예전과 비슷하게 파행의 연속이었다. 산별교섭이 이전과 달리 ‘무늬’만 교섭을 벗어났다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작은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 역시 답보 상태다. 2020년 100명 미만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은 1%가 되지 않는다. 300명 이상 50%, 공공부문 70%와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요컨대 질적 성장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정체했다.

위와 같은 노동조합의 양적 성장과 질적 정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한국형 대통령제의 문제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학자들은 한국의 정부체제를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규정한다. ‘제왕적’이라 함은 대통령 권력이 입법부나 지방정부에 비해 지나치게 크다는 뜻이다. 미국의 대통령제와 비교해 보자. 미국의 대통령은 법률을 제출할 수도 없고, 예산안을 만들 수도 없다. 심지어 천 명이 넘는 각료가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임명될 수 있다. 주 정부의 권한도 막강하다. 주 정부는 연방정부에 권한을 이양한 것 외에는 모든 권한을 갖는다. 반면 한국의 대통령은 법률과 예산안을 제출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극소수 인사만 국회에서 동의를 받는다. 지방정부의 권한도 미국과 반대로 대통령에게 이양받은 일부 행정권뿐이다.

대통령이 이렇게 강하니, 노동조합을 비롯한 경제·사회적 조직들은 대통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법이나 규범을 통한 제도적 해결은 지난한 협상, 오랜 정착 과정, 지속적 개선이 필요하다. 한번 만들어지면 공정성이나 범위에서 강점을 갖지만 만들기까지가 쉽지 않다. 반면 대통령 권한을 이용한 해결은 무엇보다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당장 고통을 주는 문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결과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해결 방식에는 큰 부작용이 뒤따른다. 우선 문제 해결 방식이 ‘상황적’이다. 공정성·타당성을 고루 살피는 것이 아니다. 여론이 지지해야, 이해관계가 맞아야, 목소리가 커야, 정치적으로 유리해야 대통령이 우선순위에 두고 해결에 나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엘리트에게 유리하다. 여론을 주도하고, 이해관계를 잘 맞추며, 언론을 통해 목소리를 키울 수 있고, 정치적인 거래도 유연하게 하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바로 사회 엘리트들이다. 제왕적 대통령은 종종 약자들의 문제를 척척 해결해 주며 자신의 권능을 서민적인 것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따져 보면 제왕적 힘을 더 많이 점유하는 건 항상 엘리트들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노동조합이 양적으로 성장한 건 빠르고 단번에 결과를 해결할 수 있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장점 덕분이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뒤이은 노조가입이 대표적 사례였다. 노총과 산별노조가 대통령의 압력을 통해 관계부처와 간접적으로 교섭할 수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다. 말하자면 문재인 정부에서 대기업·공공부문 중심의 노동조합 운동이 약간의 엘리트 특권을 누린 셈이었다.

반대로 노동조합이 질적으로 정체한 건 엘리트에게 유리하게 문제가 해결되는 제왕적 권력의 단점 탓이었다. 보편적이며 제도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초기업 교섭은 제왕적 해결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한국적 정부체제에서는 사회적 대화나 산별교섭보다 광화문의 대규모 집회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런데 목소리가 작고, 정치적인 거래도 하지 못하는 민간의 작은 사업장 노동자는 대통령을 이용한 문제 해결에서 항상 뒷줄에 선다. 이들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교섭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노동조합이 대통령만 찾으니 노동조합이 안에서도 혜택을 얻기 어려웠다.

20대 대선을 앞두고 이전과 같은 해결 방식을 들고나오는 후보들이 눈에 띈다. 대통령이 해결해 주겠다고. 노동조합은 관성적으로 이런 후보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이용한 문제 해결에 집착할수록 노동운동은 올해도 또 청와대로 몰려갈 수밖에 없다. 지난 5년간 확인했듯, 이런 해결 방식은 부작용이 크다. 노동조합은 대통령제 개혁과 법·규범을 통해 보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자신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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