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유럽연합(EU)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이 통상압박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을 통한 기업의 자율적인 공급망 환경 개선 가능성이 주목된다.

EU는 지난해 대기업에게 협력사를 포함한 공급망 내 환경·고용·인권 같은 쟁점 해소 책임을 지우는 것을 뼈대로 하는 CSDDD를 확정했다. 최근 적용시기를 1년 유예한 2028년 7월로 하는 개정안을 논의 중이다. 대규모 하청·협력사를 동원하는 다단계 하도급이 만연한 우리 제조업은 CSDDD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CSDDD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처럼 공급망 내 쟁점을 최상위 기업에게 묻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국제규범으로 구속력이 없는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보다 강력한 실정법이라는 차이가 있다.

EU CSDDD의 목표는 대기업뿐 아니라 자회사 운영과 기업 활동사슬에 속한 협력업체 운영 과정에서 발생했거나 잠재적인 인권 문제에 대한 책임을 대기업에게 지우는 것이다.

CSDDD 의무 ‘정의롭고 우호적 노동조건 누릴 권리’

CSDDD상 의무는 노동 3권 보장 같은 기본권 보장을 포함한다. CSDDD 부속서는 CSDDD가 보호해야 할 권리 중 하나로 ‘정의롭고 우호적인 노동조건을 누릴 권리’를 적시하고 있다. 이 권리는 △ 노동자의 공정한 임금 △적절한 생활임금 △자영업자·소상공인이 노동과 생산의 대가로 얻는 적절한 생활소득 △인간다운 생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조건 △노동시간의 합리적 제한 등이다. 강제노동과 아동노동을 배격하고 이주노동을 보호하는 내용도 포함한다.

적용 범위는 EU 회원국에 설립된 기업은 물론 EU 회원국 외 EU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제3국 다국적기업도 포함한다. 실사지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들 기업에 대한 실사도 할 수 있다. EU시장에서 사업하는 우리나라 국적의 기업들도 이 지침에 따른 의무를 부과받고, 실사대상에도 포함된다.

우리 정부는 통상압박 대응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4일 민·관 원팀 대응을 강조했다. 이날 이재근 산자부 신통상전략지원관은 “공급망 실사지침은 우리 수출기업의 경영 전략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으로, 정부와 업계 간 긴밀한 공조가 중요하다”며 “현장 중심 소통을 통해 우리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지침의 취지에 부합하는 합리적 시행방안을 EU 통상당국과 회원국에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수의 사내하청사·협력사에 형식적 도급관계를 유지하는 우리나라 제조업 특성상 CSDDD의 직접적인 영향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지침 전문에는 “1998년 국제노동기구(ILO)의 노동 기본원칙과 권리선언에 정의된 5가지 기본원칙과 권리를 포함해 인권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돼 있다. ILO의 해당 선언 내용은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보장 △강제·아동노동 금지 △차별 금지 △안전한 작업환경 등이다. 이를 위반하거나 침해하면 실사 대상이 된다. 최악의 경우 수출규제 등 제재도 예상할 수 있다. 과장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강제노동을 금지한 국제규범과 미국 국내법 영향으로 우리나라 태평염전 천일염의 미국 수출길이 막힌 사례가 실제 있다.

‘녹색단협·하청 작업중지 보장’ 등 대응 가능
노동장관 “원·하청 협력이 글로벌 스탠더드”

원·하청 교섭을 허용하는 노조법 2·3조 개정안은 이런 공급망 실사에 대응하는 실질적인 경로가 될 수 있다. 노동계는 이미 수년째 단체협약안으로 녹색단협을 내밀고 있다. 탄소중립을 위한 계획을 교섭 대상으로 삼고 탄소중립 실천에 나서자는 의미다. 금속노조가 올해 단체협약에서 제시한 실질적인 하청노동자 작업중지권 보장도 산업재해 등에서 하청노동을 보호하는 방안으로 CSDDD 같은 실사에 대응할 수 있는 구실이 된다.

정부도 이런 측면을 주목하고 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노조법 관련 브리핑에서 “유럽의 공급망 실사법(CSDDD)과 같이 책임 있는 경영, 책임 있는 거래가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노사 당사자가 스스로 책임지고 대화하고 해결하는 노사자치의 원칙에 따라 원·하청이 단절에서 벗어나 협력 관계로, 수직적 구조가 아닌 수평적 대화로 나아갈 것이며 이를 통해 지속가능한 국내 산업 생태계 상생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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