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좋아한다. 우리나라 것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마니아’ ‘덕후’ ‘평론’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시청자다. 요새는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덕분에 방구석에서도 세계 각국의 다양한 드라마를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신세계. 요즘 같은 불볕더위 휴가철, 밖으로 한 발도 나가기 싫은 독자에게 딱 맞는 피서법을 권한다. 바로 중드(중국드라마)!
내 인생 첫 중드 ‘천성장가’
‘삼생삼세’ 도교적 세계관 작품들
시작은 넷플릭스였다. 나의 인생 첫 중드는 ‘천성장가’. 천성왕조의 노래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가상의 고대국가 대성국에서 역성혁명을 통해 세운 천성국의 황자와 전 왕조 공주의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 하면 너무 단순하지만 줄거리는 여기서 생략. 총 70편의 대작이었다.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분량이지만 한 편당 우리 드라마의 절반 분량인 45분 정도로 연휴에 몰아보기 ‘신공’이 가능했다. 장중한 사극에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가슴을 저몄다.
중드를 더 찾아보기 시작했다. 다음 넷플릭스에서 찾은 중드는 ‘미미일소흔경성’. 미미의 미소가 아름답다, 이렇게 해석된다고 한다. 미미(정솽 분)가 게임하는 모습을 우연히 본 초내(양양 분)가 첫눈에 반하게 되면서 펼쳐지는 전형적인 청춘 로맨스물.
중드에는 이른바 ‘치아문 시리즈’가 있다. ‘치아문’은 ‘우리의’ 정도로 해석된다고 한다. 청춘 로맨스물로 치아문단순적소미호(우리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절에게), 치아문난난작소시광(우리의 따뜻했던 시절에게), 치아문첨첨적소미만(우리의 달콤한 행복에게). 달달 그 자체.
하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삼생삼세십리도화’(세 번의 삶, 세 번의 세상, 십리에 가득 핀 복숭아꽃)를 꼽을 수 있다. 세계관이 거창하다. 기본이 만년 단위, 남녀 주인공은 신족이지만 인간 속세로 떨어지는 등 세 번의 삶을 살아가며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만난다. 이 과정에서 사랑을 잃고 사랑을 되찾는 절절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즈음 궁금해졌다. 중드의 장르가 생소한데? 찾아보니, 현대극·고장극·시대극·무협극·선협물·로맨스·코미디·수사극 등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무협극은 홍콩 영화를 통해 익숙한데 고장극과 선협물은 신선했다. 고장극은 고대 의상을 입고 옛날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선협물은 무협에 신선·도술 등의 요소를 결합한 장르라고 한다.
‘삼생삼세십리도화’는 선협·로맨스·판타지·고장극 장르로 구분될 수 있겠다. 도교와 불교, 중국 고대 전설과 신화의 세계관이 혼합됐다고 한다. 비슷한 장르로 ‘향밀침침여신상’ ‘침향여설’ ‘창란결’ ‘유리미인살’ 등이 있다. 천계와 마계, 인간계, 억겁, 윤회 같은 장치가 있다.
나의 중드 세계는 또 다른 OTT인 티빙을 만나면서 한층 더 넓어졌다. 티빙에는 넷플릭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중드 작품들이 서비스된다. 중드의 대표적인 무협물에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가 있다. 홍콩 작가 김용의 ‘사조 삼부곡’이라고 한다. 김용의 후반기 작품인 ‘천룡팔부’도 있다. 중드에서는 이들 작품을 몇 년마다 주기적으로 새롭게 제작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티빙을 보니, 사조영웅전은 1983년, 1994년, 2003년, 2008년, 2017년, 2024년 버전이 있다. 다 보진 못했지만 2017년 버전을 좋아한다.
타임슬립 통해 고장극 세계로
신데렐라 벗어던진 여성의 성장기
역사극을 빠뜨릴 수 없다. ‘삼국지’가 대표적이겠지만 이 밖에도 ‘독고천하’(수나라), ‘장가행’(당나라), ‘대송궁사’(송나라), ‘대명풍화’(명나라), ‘연희공략’(청나라) 등의 작품은 실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려 낸다. 물론 궁중암투는 기본. 시대적 상상력으로 중국 역사에 접근한다는 매력이 있다.
한층 나아가 ‘타임슬립’이라는 장치를 통해 과거로 가서 실제 역사적 인물과 엮이는 내용의 작품도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보보경심’이다. 현대 중국 여성 장효가 우연한 사고로 청나라 귀족 여성으로 타임슬립한다. 그는 강희제의 8황자 궁에 머물며 다양한 황자들과 친분을 갖는데 그중 훗날 옹정제가 되는 4황자와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보보경심 려’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했다. 슬픈 OST는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있다.
앞서 청춘 로맨스, 선협물, 고장극 등의 공통점을 들라면 ‘신데렐라 스토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당당했던 여성도 남성을 만나는 순간 갑자기 신데렐라가 되기 일쑤다. 남성은 재력이든 능력이든 헌신이든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리드한다.
하지만 조금씩 여성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성장 스토리’도 눈에 보인다. 현대물 중에는 ‘겨우, 서른’ ‘매괴적고사’ ‘도시남녀의 로맨스’ ‘니비성광미려’, 고장극 중에는 ‘국색방화’ ‘석화지’ ‘몽화록’ 등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한국 드라마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아버지나 남편 등 집안의 남성이 식사를 준비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유행도 타는 것 같다. 타임슬립이 시대를 건너뛰기보다는 자신이 죽기 전 상황으로 가서 잘못을 바로잡는다든지(영안여몽, 구중자), 웹툰이나 게임, 가상의 세계 같은 곳으로 빠져들어 활약한다든지(경여년, 췌서:데릴사위, 대봉타경인) 같은 식이다. 브로맨스 작품이 유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샤오잔과 왕이보의 ‘진정령’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령을 추천하곤 하는데, 남녀 못지않은 잔잔하고 애틋한 감정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막장도 있다. ‘묵우운간’의 주인공은 남편에게 배신당해 죽음 직전 살아나와 다른 사람 이름으로 복수를 행한다. 얼굴에 점 하나조차 찍지 않았는데도 가족들이 못 알아본다. 이 밖에 추리물 중에는 ‘어사소오작’ ‘당조궤사록’을 추천한다. 애국주의가 가미됐지만 덜 부담스러운 ‘친애적 열애적’ ‘니시아적영요’도 볼 만하다.
중드 통해 현대 중국 엿보기
미중갈등은 뒤로, 드라마는 드라마로
여기에서 주로 다룬 중드는 이른바 중국 본토 작품이다. 대만과 홍콩 작품은 결이 달라서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중드를 보는 이유를 주로 “멍때리기”라고 표현한다. 힐링의 다른 말이다. 주말에 중드를 보며 스트레스를 푼다. 한국에 수입된 중드 작품 중에는 정치물·사회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머리가 복잡할 때는? 단연 중드다. 달달하다, 슬프다, 애틋하다, 설렌다, 판타스틱하다, 뭐 이런 감정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휴가철에 딱 아닌가.
다음은 ‘연결’이다. 의외로 주변에서 중드를 보는 사람들이 좀 있다. 어머니는 집에서 케이블 방송으로 중드를 보신다고 한다. 최신 중드를 먼저 접하시고는 내게 보라고 이것저것 권하시곤 한다. 대화가 많지 않은 집이지만 중드가 연결고리로 작용하곤 한다.
현대의 중국을 엿볼 수 있다는 덤도 있다. 판타지를 그려 내는 선협물이나 고장극에서는 날이 갈수록 CG(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발전을 볼 수 있다. 내가 놀랐던 도교적 세계관의 작품을 CG 기술로 거의 완벽하게 그려 내고 있다. 현대물에서는 상하이·광저우·선전·항저우 등 화려한 도시와 함께 중국 중산층의 모습을 그려낸다.
미중 갈등 속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은 복잡하다. 마이클 필스버리의 <백년의 마라톤>에서는 미국이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우리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휴가철에서만큼은 복잡한 마음은 날려버리자. 드라마는 드라마로, 달콤쌉쌀 중드의 세계로 풍덩 빠질 준비 됐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