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엔딩크레딧

KBS청주방송총국에서 2011년 5월부터 일한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작가로 일한 A씨는 지난해 11월 프로그램 폐지를 이유로 갑작스럽게 해고됐다. 13년간 매일 방송국에 출근해 원고를 작성하고, 상품권을 발송하거나 방송장비를 조작하는 업무를 맡았다. 10년 넘는 근무기간과 A씨가 프로그램에 기여한 역할이 무색할 정도로 프로그램 폐지 결정도, 해고 통보도 모두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A씨는 프리랜서 계약을 체결했지만 원고 작성뿐 아니라 행정업무까지 대부분 담당 피디 등 사용자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A씨는 충북지방노동위원회에 이어 중앙노동위원회에서도 ‘부당해고’를 인정받았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았지만 온전한 복직이 이뤄질 수 있을지 우려가 나온다. 3년 전 KBS 전주방송 작가가 중노위 판정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됐지만 작가업무와 무관한 행정업무에 배치됐기 때문이다.

A씨는 <매일노동뉴스>에 “라디오 작가로 복직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며 “(원직복직이면 라디오 작가로 돌아가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인데 이렇게까지 간절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매일 방송국 출근해 원고작성부터
상품권 발송, 방송장비 조작까지

27일 <매일노동뉴스> 취재 결과, 중노위가 KBS 청주방송 라디오 작가에 대한 부당해고를 인정한 사건의 재심판정서가 최근 노사에 전달됐다. 노동위원회 처분 효력은 판정서를 송달받은 날부터 발생한다. 중노위는 “이 사건 노동자를 원직에 복직시키고 해고기간 동안 정상적으로 근무했다면 받을 수 있었던 임금상당액을 지급하라”는 초심 주문을 유지했다. 판정에 이의가 있는 경우 재심판정서를 받은 날부터 15일 이내 대전지법 또는 서울행법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A씨는 계약의 형식만 프리랜서일뿐 사실상 회사의 지시를 받아 직원과 다름없이 일했다.

생방송 프로그램 작가로 일할 때 담당 PD에게서 출연자 섭외부터 코너 내용 등 방송 원고작성과 관련한 내용도 이메일을 통해 업무지시를 받았다. 집필 업무 외에도 상품권 대장 정리와 발송, 방송장비 세팅 같은 부가 업무도 수행했다. 매일 방송 1~2시간 전 방송국 작가실에 출근해 업무를 수행했다.

중노위는 “방송원고 작성 외에도 사용자의 업무상 지휘·감독하에 출연자 섭외, 큐시트 작성, 방송 녹음·편집, 방송장비 조작, 상품권 발송, 홈페이지 게시물 작성 및 업로드 등 근로를 제공한 것으로 판단되며 근무시간과 장소가 사용자에 의해 지정된 점 등을 고려하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3년 전 정규직 전환된 KBS전주 작가
수신료 관련 행정업무 배치

3년 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중노위는 2022년 4월 KBS전주방송총국에서 일한 작가를 해고한 사건에 대해 부당해고를 인정한 전북지방노동위원회 초심을 유지했다. 라디오 작가로 입사한 뒤 생방송 토론 작가로 일하다 해고된 작가 B씨는 연출을 맡은 기자에게 카카오톡으로 패널 섭외와 자료조사부터 원고작성까지 제작 과정 전반에서 상시적으로 업무지시를 받았다.

중노위 판정서 송달 이후 KBS 사쪽은 행정소송을 하는 대신 노동위 판정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B씨는 보도국이 아닌 문화방송국으로 복직됐다. 작가업무와는 무관한 행정업무에 배치된 것이다. B씨는 현재 군산사업지사에서 수신료 관련 업무를 맡고 있다. 정규직과 임금체계도 다르다. 호봉테이블 없이 매년 평가를 통해 연봉이 책정된다. 사쪽은 B씨에게 ‘작가 업무로 직무 전환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B씨는 “KBS는 ‘정규직 작가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노동위 판정 결과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또 다른 작가들이 노동위나 법원으로 가는 그 동력을 잃게 만드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KBS는 앞서 2021년 고용노동부 근로감독 결과 근로자성이 인정된 방송작가들을 행정직으로 채용한 바 있다. 당시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노동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KBS는 시정지시 대상이 된 작가 54명 중 퇴사자 5명, 근로계약을 거부한 14명을 제외한 35명과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이 중 26명은 기간제(방송지원직)로, 9명은 무기계약직(행정직)으로 채용했다.

KBS 사쪽은 청주방송 라디오 작가 중노위 판정과 관련해 “재심판정서를 수령했고 검토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A씨가 KBS청주방송 작가로 복직하게 되는지, KBS전주방송 전례를 따르게 되는 것인지, 현재 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작가가 있는지, 노동부 근로감독 이후 근로계약을 체결한 작가들이 현재 몇 명 남았는지 등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았다.

‘원직=계약종료 전 상태’라며
프리랜서로 복직시킨 사례도

‘원직복직’에 대한 구체적 기준이 명시돼 있지 않다는 제도적 허점이 존재한다. 노동위원회규칙 79조에 따르면 원직복직에 대한 구제명령 이행은 △해고를 할 당시와 같은 직급과 같은 종류의 직무를 부여했거나 △근로자의 동의를 얻어 다른 직무를 부여했는지 여부 △같은 직급이나 직무가 없는 등 불가피한 사유가 발생한 때에는 유사한 직급이나 직무를 부여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김유경 공인노무사(노무법인 돌꽃)는 “노동위원회규칙이 포괄적으로 규정돼 있는 데다 대법원 판례도 사용자의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도적 허점을 악용해 노동위 구제명령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사례도 있다. 경남CBS는 중노위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은 아나운서를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로 복직시킨 바 있다. 당시 CBS 사쪽은 “계약종료 전 상태 그대로 복직하는 것이므로 프리랜서로 복직하는 것”이라며 ‘원직’을 ‘계약종료 전 상태’라는 논리를 폈다.

김유경 노무사는 “당시 노동위는 ‘원직복직 관련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 구제명령을 불이행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구두로 답했다”고 전했다. 김 노무사는 “‘무늬만 프리랜서’인 노동자들이 개별적 다툼을 통해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사례가 많아졌는데도 옛날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탓에 사용자들이 제도적 허점을 악용하고 있다”며 “지금이라도 프리랜서에 대한 노동자성 인정 추세를 반영해 내부 기준을 새로 만들거나 노동위원회 규칙을 개정하는 등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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