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사는 우리 외할머니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동네 길고양이들 밥 주는 일이다. 할머니 집 근처에서 지내는, 가족으로 추정되는 고양이 네댓 마리가 밥 손님이다. 커다란 화분 받침대를 물그릇으로, 딸기 사면서 온 플라스틱 대야를 밥그릇으로 삼아 챙겨주는데, 할머니에게 ‘밥’이란 곧 ‘쌀’을 의미하기에 주로 쌀밥을 준다. 고양이는 육식동물이라 안 먹을 법도 하지만, 언제 또 배불리 먹을지 몰라서인지 곧잘 먹는다. 고양이들도 할머니를 잘 따른다. 할머니가 마당에 나오면 꼬리를 바짝 세우고 할머니 다리에 몸을 비비거나 바닥에 뒹굴며 애교를 부린다. 그게 예쁜지 얼마 전 할머니는 고양이들 먹인다며 장에서 ‘개 사료’를 한 포대 사기도 했다.
할머니가 원래 고양이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짐작하기로 할머니의 변화는 이모 가족이 입양한 강아지 ‘또또’ 덕분인 것 같다. 그동안 할머니와 살았던 동물은 소, 닭, 오리, 거위 같은 ‘가축’이 대부분이었고, 오래전 마당에 살던 개가 그나마 가까웠다. 팔십 평생 동물이란 밖에서 사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또또가 처음 왔을 때 할머니는 “개를 무슨 방에서 키우냐”라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또또를 안아주고, 놀아주고, 배변을 치워주고, 간식도 제일 많이 주며 극진히 모신다. 또또와 지내보니 지나가던 고양이에게도 관심이 생겼고, 눈에 들어오니 쫓아내지 않고 밥을 주게 된 게 아닐까 싶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존재를 알아보고 자신의 공간에 들여 서툴지만 정성껏 대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신기하고 감동적이다.
여론조사 회사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6월 진행한 ‘2024 성소수자 인식조사’ 설문조사에 따르면 주변 지인 중 성소수자가 있는지가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응답자 1천 명 중 성소수자 지인이 있는 사람 중 43%가 성소수자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고, 성소수자 지인이 없는 사람은 13%만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적대적인 감정은 반대였다. 성소수자 지인이 있다면 26%가, 없다면 46%가 성소수자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성소수자에게 호의적일 것이라 느껴 성소수자 당사자가 커밍아웃해 성소수자 지인을 두게 된 경우가 많겠으나, 어떤 경로로든 지인을 통해 성소수자 존재를 인지하고 선입견과 오해가 사라져 호의적으로 변한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확인하는 것부터 어렵다. 2023년 6월 퀴어노동권포럼에서 진행한 ‘커밍아웃의 조건 찾기 실태조사’에서 성소수자 직장인 64.1%가 직장에서 커밍아웃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할머니네 고양이들에게서 ‘나’를 숨기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제는 마당을 자유롭게 오가고 집 앞 밭 한가운데서 한가로이 장난도 치지만, 할머니가 보살피기 전까지 고양이들은 조그만 인기척에도 놀라 달아나기 바빴다.
커밍아웃할 수 없는 직장인들도 마찬가지다. 성소수자와는 같이 살 수 없다는 동료들 사이에서 언제 다칠지 몰라 불안해하며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해야 한다. 오해받고 험담을 들어도 아닌 척 거짓말하며 움츠러들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일터를 떠날 수 없기에, 있어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틴다.
성소수자에 대한 적대감은 알지 못함에서 비롯된 막연한 감정일 수 있다. 개는 방에 들어올 수 없다던 할머니 같은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여고 동급생끼리 연애하면 큰일 나고, 남성 간의 로맨스는 아이돌 팬픽에나 존재하는 환상이며, 거리를 걷는 저 이가 트렌스젠더일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마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실수를 했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거쳐 경험의 폭이 넓어지며 생각도 달라졌다. 이상하거나 잘못된 사람은 없었고,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만이 보였다. 우리를 가로막는 건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없으리라’라는 편견이라는 걸 깨달았다.
같이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와 다른 누군가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없다고 생각하면 쉽게 차별하게 된다. 있음을 인정하면 보이고, 보이면 어떻게 해야 같이 잘 살 수 있을지 상상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성소수자 동료와 일하고 있다. 고양이에게 쌀밥과 개 사료를 챙겨주는 것처럼 곁을 내어줄 마음만 있다면 어설프더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실수하고 배우며 같이 살자. 달라도 같이 살 수 있더라.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