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52·사진)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은 아직 발을 절었다. 97일간 좁은 고공농성장에서 새우잠을 자듯 몸을 뻗지 못한 탓에 신체의 근육량이 거의 다 빠져나갔다고 한다. 1일 만난 김 지회장은 겨우 이틀 전까지 보행보조기로 걸어야 했다. 전날 8천보를 무리해서 걸었더니 다리가 부었다며 “더 회복해야 하지만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으니 더 시도해서 걷는다”며 웃었다. 그 말의 고갱이가 꼭 조선하청지회의 투쟁을 닮았다. 그는 이날 퇴원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가 541일째 고공농성 중인 경북 구미를 방문한 뒤 거제도로 갔다.
김 지회장은 이날 오후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 1층 로비에서 퇴원을 기다리며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른바 ‘말벌’을 비롯해 세종호텔 고공농성 단위, 인권활동가 등이 퇴원하는 그를 방문해 격려했다. 병원 입구에서 만난 그들은 서로를 힘껏 끌어안으며 웃었다. 지난달 19일 입원한 김 지회장은 치료가 좀 더 필요했지만 입원이나 서울 통원치료를 연장하기보다 거제도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가 97일간 버텨야 했던 이유, 또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곳에 있다.
김 지회장 건강은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고 한다. 그는 “뼈가 부러진 부상 같은 게 아니라 좁은 공간에 구겨진 상태로 오래 있다 보니 생긴 문제”라며 “불편하더라도 거제도에서 치료를 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양방과 한방 두 곳 병원을 물색 중이라고 한다.
오체투지 무산 뒤 “윤석열은 대체 무슨 철천지원수인가”
“아쉬운 합의예요.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인데 그 일부를 이행하는 것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승리해서 기쁘다기보다 다음 투쟁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한화오션 사내하청 노사의 앞선 합의에 대해 평가와 다짐을 물었다. 고공농성 97일이라는 표현에 다 담을 수 없는 교섭이었다. 한화오션 사내하청 노사는 지난해 10월부터 교섭을 시작했지만 무려 8개월이 흐른 뒤 가까스로 합의에 도달했다.
질곡이 많았다. 고공농성이 정점이라면 한겨울인 지난해 11~12월 옥포조선소 선각삼거리에 천막조차 펴지 못한 채 풍찬노숙을 44일간 이어 간 것이 저점이다. 집회·기자회견·단식 등 할 것은 다 했다. 선각삼거리는 2022년 5~6월 51일간 파업을 시작했던 곳이다.
하이라이트는 하지 않은 투쟁이다. 원래 김 지회장과 조합원들은 오체투지를 계획했다. 단식하던 몸을 이끌고 국회 앞에서 오체투지 방식으로 잘 알려지지 않는 투쟁을 알리려 했다. 그래서 언론에 기자회견 일정과 오체투지를 한다는 사실을 배포하고 거제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그날은 지난해 12월3일이었다.
“윤석열은 대체 우리와 무슨 철천지원수를 진 것인가 싶었어요.” 김 지회장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데없는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으로 오체투지는 해보지도 못하고 무산됐다. 그날 이후 온갖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김 지회장은 계엄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도 해보지 못한 투쟁의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란의 역설, 시민과 노동자 연대의 오늘
역설적으로 윤석열의 계엄은 지회와 시민을 만나게 했다. 12월3일 밤 윤석열 계엄을 막은 시민의 연대는 남태령과 한남대로를 거쳐 마침내 한화오션 사내하청 노동자, 한국옵티칼 해고노동자 등에게 닿았다. 이날 병원에 있는 김 지회장을 찾은 동덕여대 재학생 ㄱ씨는 “연대투쟁호를 만드는 무지개조선소에서 금속노조를 알게 된 뒤 20대 여성을 평등하게 대하는 모습에 즐거움을 느꼈다”며 “이후 당연한 요구를 하는 노동자가 핍박받는 것을 보면서 부당한 싸움이 아니고 일개 학생도 연대하며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항상 노동자와 시민이 연대하는 것을 꿈꿨는데 12·3 내란사태는 역설적이게도 말도 안 되는 계엄령 선포를 통해 사회적 문제와 우리 사회의 극우세력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고, 동시에 노동자의 노동문제와 소수자의 차별문제를 공감하고 공유하게 됐어요.”
차별이라면 지긋지긋한 하청노동자, 차별이 생존의 문제인 성소수자가 함께 손을 잡을 수 있는 시공간은 그렇게 2025년 한국 사회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계에서도 ‘강골’로 유명한 김 지회장은 지난달 19일 고공농성을 해제하고 하강한 날 휠체어에 앉은 채 시민에게 둘러싸여 울었다. 말벌도 울었다. 그날 김 지회장은 목에 동덕여대 공학 반대를 의미하는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조선 하청노동자들은 세종호텔과 한국옵티칼은 물론 이제 동덕여대와 퀴어퍼레이드를 누빈다. 김 지회장을 응원하기 위해 방문했던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는 비정규 노동자는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다”며 “차별과 인권에 대한 높은 수용성이 말벌이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470억원 손배 비롯 노동자 착취 부당성 인식 확산
지회는 이제 또다시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올해 교섭이 다시 시작한다. 이달 중으로 교섭의제를 정리한다. 성과급 인상 요구를 포함하느냐가 주목된다. 그러나 김 지회장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런 사실 자체를 알리는 데 있다. 김 지회장은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더 오래 고공에 있으면서 한화오션과 관련한 원청 사용자의 책임과 정권의 부당한 개입 같은 사실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농성 시작 당시의 요구와 취지가 있어서 조건이 형성돼 내려오게 됐지만 앞으로 더 이 문제를 길게 물고 늘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 지회장은 투쟁의 목적을 “한화(오션)가 당연히 책임져야 할 것을 책임 없음으로 일관하는 것에 대해 그런 사실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것을 노동자와 시민이 인식하고 공유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라고 말했다. 김 지회장은 한화오션을 올해 교섭에서는 반드시 테이블로 끌어내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470억원 손해배상 철회에 이목이 집중됐지만 470억원 손배를 철회하지 않더라도 이 손배가 얼마나 부당한지, 그를 통해 노동자를 괴롭히고 노동을 착취하면서 어디까지 이윤을 추구할 것인지 따지는 사회적 문제 제기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려오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여전히 고공에 머물러 있는 동료 때문이다. 이날로 541일째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박정혜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 139일째인 고진수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이다. 김 지회장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내려왔지만 마음의 짐이 있다”며 “빨리 내려올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같이 이겨 내겠다”고 말했다.
이청우 세종호텔 정리해고 철회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단체협약 관련 쟁점으로 100일 가까이나 고공농성을 해야 한다는 것에 분노했다”며 “내려오게 돼 다행이고, 김 지회장이 하강한 뒤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등 고공농성을 함께한 3개 단위가 끝까지 같이 가겠다는 의미로 세종호텔 해고철회 고공농성장에 깃발 3개를 나란히 달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