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직장내 괴롭힘을 호소헀던 피해자가 사용자쪽의 보복성 짙은 고소로 전과자가 됐다. 법원은 피해자 트집을 잡으려 사용자가 법인카드 영수증을 전수조사한 결과 확인된 일부 오용 내역을 업무상배임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직장내 괴롭힘 피해와 업무상배임죄는 별개”라며 기계적인 법 집행을 강조했지만 직장내 괴롭힘 전문가들은 당혹감을 드러냈다. 피해자에서 전과자가 된 당사자는 “(보복을 당하니 다른 노동자들은) 직장내 괴롭힘 신고하지 마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16일이면 직장내 괴롭힘 금지 내용을 담은 근로기준법 조항 시행 5주년을 맞는 가운데, 사업주의 보복행위로부터 직장내 괴롭힘 피해자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이 보이지 않고 있다.

노동지청 직장내 괴롭힘 인정
피해자 법인카드 사용내역 전수조사

15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ㄱ씨는 4년 전 직장내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다. 노동청도 직장내 괴롭힘을 인정했다. 그러나 2차 가해와 보복행위가 이어졌다. 입사 이후 법인카드와 업무용차량 사용내역을 근거로 업무상배임 고발을 당해 대법원의 확정판결까지 받았다. ㄱ씨는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근로기준법 76조의2)은 무력했고 법원은 무정했다”고 말했다.

사건은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ㄴ사로 이직한 ㄱ씨는 2020년 대표이사를 직장내 괴롭힘으로 회사에 신고한 데 이어 노동지청에도 신고했다.

노동지청은 직장내 괴롭힘을 인정했다. 그런데 사건은 그때부터 더 커졌다. ㄱ씨가 피해자 보호를 이유로 신청한 휴직을 받아들인 ㄴ사는 그가 휴직한 사이 법인카드 사용내역을 전수조사했다. 그 결과 ㄱ씨가 2018년 1월부터 2020년 6월까지 284만9천520원을 개인적으로 썼다며 업무상배임으로 고소했다. 사측은 ㄱ의 복직을 거부했다. 가까스로 복직한 ㄱ씨에게 징계를 내리는 등 보복성 짙은 조치가 이어졌다.

사법부는 ㄱ씨의 업무상배임을 인정했다. 유일한 예외가 1심 재판부다. ㄱ씨가 업무상배임 유죄에 따른 벌금 300만원 약식명령에 반발해 제기한 형사재판에서 1심 재판부는 “회사원이 회사 신용카드를 사용해 밥 한 끼를 먹었다고 해 이를 업무상배임죄로 처벌한다면 형법의 보충성 원리에도 위반되고 상식에 반하는 형법적 평가를 하는 셈이 된다”고 판시했다. 무엇보다 ㄴ사 대표의 업무상배임죄 관련 경찰조사 진술에 대해 “ㄱ씨가 ㄴ사 대표와 다투고 퇴사하는 과정에서 대표를 노동청에 진정한 것에 대한 보복감에서 행한 진술로 보여진다”며 직장내 괴롭힘 보복행위를 간접적으로 지적했다.

ㄴ사 대표가 재판부에 제출한 처벌불원서 등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에 따르면 ㄱ씨의 업무상배임죄를 주장했던 ㄴ사 대표는 이후 조사 과정에서 ㄱ씨의 법인카드 사용 당시에는 문제 삼지 않았다가 다른 목적과 동기를 갖고 고소했다는 취지로 답변했고, ㄱ씨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1심 “밥 한끼 먹었다고 배임? 상식에 반해”
대법원 “직장내 괴롭힘과 배임은 무관”

‘다른 목적과 동기’란 ㄱ씨의 노동지청 2차 진정이다. ㄱ씨는 복직이 지속적으로 거부되고 징계까지 받는 상황에서 법인카드 사용내역에 따른 업무상배임 고소까지 당하자 이를 노동지청에 보복행위로 고소했다. 이후 ㄱ씨와 ㄴ사 대표는 관련 갈등을 이어가다 양쪽 모두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업무상배임을 고소한 ㄴ사의 대표가 처벌불원서를 낸 직접적 배경이다. 1심 재판부는 적극적으로 이런 내용을 조사해 무죄로 판결했다.

2심은 ㄱ씨를 무죄로 본 원심을 뒤집었다. 직장내 괴롭힘과 업무상배임은 무관하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재판부는 “직장내 괴롭힘 보복행위로 고소(업무상배임)를 제기한 것이라 해도 고소 경위가 업무상배임죄의 성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대법원도 마찬가지다. ㄱ씨는 취업규칙과 ㄴ사의 업무용차량 이용지침, 법인카드 사용규정 등을 다양하게 소명했지만 판결을 뒤집지 못했다. ㄱ씨는 상고하면서 업무용차량이 규정상 원격지 출퇴근을 허용하고 있는 점, ㄴ사 인근 임대주택과 자신의 주소지인 다른 광역시도를 오가며 출퇴근을 하는 점, 이런 사실을 ㄴ사도 알고 있었던 점 등을 소명했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죄를 확신했던 ㄱ씨는 평정심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1심 재판부가 고심 끝에 내린 결과에 대해 상고법원이 제대로 고민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 공소장마저도 일부 틀리게 기재된 2심 법원의 결정을 그대로 인용했다”며 “말도 안 되는 재판의 결과 직장내 괴롭힘을 신고했던 피해자만 전과가 남았고 ㄴ사와 그 대표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기막혀했다.

‘보복’ 아닌 ‘행위’ 강조한 기계적 판결
“‘피해자 보호’ 대책 마땅찮아”

이번 대법원 판결은 직장내 괴롭힘 보복행위에 대한 기계적 판결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직장내 괴롭힘 피해자가 업무 중 모든 분야에서 ‘무결함’을 입증하지 않으면 이런 보복행위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결과도 예상된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전문가들도 당혹감을 드러냈다. 법학을 전공한 한 교수는 “보복행위라 할지라도 업무상배임이 드러난 이상 법원 책임을 방기할 수 없으므로 직장내 괴롭힘과 업무상배임죄가 달리 판결되는 것은 현행 법리상 어쩔 수 없어 보인다”면서도 “직장내 괴롭힘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보복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뚜렷히 떠오르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공인노무사는 “근로기준법상 76조의3, 피해근로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에 반했다는 주장을 해 볼 수 있다”면서도 “이미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상태라 불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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