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기완마당집에서 참석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윤정 기자>
▲ 백기완마당집에서 참석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윤정 기자>

“이거봐~ 윤석열이! 나 알잖아, 내 말 들어.”

134주년 노동절인 5월1일 ‘백기완마당집’이 공식 개관한다. 백기완 선생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서울 종로구 명륜동 통일문제연구소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백 선생이 별세한 지 3년 만에 완공했다. 전시시설과 회의·카페공간 등 노동자·시민이 일상적으로 방문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상징적으로 대문만 있을 뿐 담벼락이 없다.

백기완 발자취 담긴 1층 상설전시관
“마냥 쓰러질 것 같아도 앞으로 앞으로”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이사장 신학철)은 공식 개관 하루 전인 4월30일 오전 백기완마당집 2층 회의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백기완마당집 역사적 의미와 전시내용 등을 설명했다. 재단 신학철 이사장·양규헌 운영위원장·박점규 노동담당이사와 함께 명진 스님·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전 문화재청장)·노순택 사진작가가 참석했다.

백기완마당집은 크게 1층 상설전시관과 2층 특별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1층 전시관은 ‘바깥 전시’와 ‘안 전시’로 나뉘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백기완마당집 2층 창밖에 전면에 내걸린 옥외간판 형식의 작품이다. “이거 봐~ 윤석열이! 나 알잖아, 내 말 들어”라고 쓰인 작품명은 ‘창밖의 외침’이다. 백 선생이 과거 청와대 앞 집회에서 호통치던 말을 따왔다고 한다. 바깥 전시에는 백기완마당집 짓기 후원명단 6천831명이 새겨진 동판도 있다.

전시자문을 맡은 노순택 작가는 “권력자를 향해 똑바로 정치하라고 호통치던 취지를 담았다”며 “1년에 3~4번 주기적으로 이 시점 백기완 선생은 어떤 말씀을 할까 문장을 시각화해서 ‘창밖의 외침’으로 걸 것”이라고 말다. 광화문 교보문고 옥외간판을 떠올리면 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냥 쓰러질 것만 같애도 앞으로 앞으로’라는 부제를 단 1층 상설전시관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에는 신학철 화백의 ‘백기완 부활도’ 작품이 버티고 있다. 백 선생이 5·18 기념식에서 주먹을 쥔 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이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배경으로 삼았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그 왼쪽에는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하에서 투쟁하고 얻어맞고 투옥되고 재판받는 모습 등이 전시돼 있다. 군사재판 소송기록, 수많은 소환장과 벌금고지서가 눈에 띈다. 더 왼쪽으로는 ‘노동해방꾼’ 백기완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그중 “삶의 끝자락, 병석에서 떨리는 마른 손을 다잡으며 보름 동안 써 내려간” ‘노동해방’ 네 글자가 다가온다.

▲ 1층 상설전시관 모습. <연윤정 기자>
▲ 1층 상설전시관 모습. <연윤정 기자>

 

삶의 끝자락에 써 내려간 ‘노동해방’
선생이 머물던 ‘옛방’ 그대로 재현

이 밖에도 △통일꾼, 예술꾼, 이야기꾼, 우리말 사랑꾼, 노동해방꾼 백기완의 이야기 △‘임을 위한 행진곡’에 얽힌 이야기 △백기완 민중사상의 핵심 ‘노나메기’ 이야기 △육필원고, 펴낸 책들, 민주화운동 흔적들, 아끼던 물건을 담은 유물함이 전시돼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큐알코드를 통해 원곡 악보를 내려받고 1982년 원곡을 들을 수 있게 했다.

유물함에는 ‘뜻밖의’ 물건도 들어있다. 2002년 월드컵 거스 히딩크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이 백 선생에게 보낸 편지와 축구협회에서 보낸 축구화다. 당시 백 선생이 국가대표선수들 앞에서 강연을 펼쳤는데 히딩크 감독이 고마운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은 “하얀 머리카락에 두루마기를 입고 나오신 모습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며 “선생님의 경력과 강의 내용을 듣고 한국 현대사의 쓰라린 측면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의 줄기찬 항거의 의지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채원희 재단 사무처장은 “백 선생님은 원래 축구선수를 꿈꿨다”며 “나이 들어 축구를 직접 할 수 없으니까 축구화를 신고 마당을 많이 걸어 다니셨다”고 전했다.

1층 왼쪽에는 백 선생께서 글을 읽고 쓰고, 수많은 이들과 만났던 옛살라비(옛방)가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다. 커다랗고 두꺼운 나무책상 위에는 각종 서적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고, 책장 꼭대기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장준하 선생 사진이 놓여 있다. 의자 뒤편에는 신학철 화백의 작품 ‘엿장수’가 걸려 있다. 농사를 짓다 산업화로 공장에 들어갔는데 프레스에 손이 잘려 할 것이 없어 엿장수가 된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시장에서 목젖이 보일 정도로 목이 터져라 엿을 사라고 외친다.

옛방에는 백 선생이 평소 입었던 검정색 두루마기와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입었던 하얀색 바지저고리, 1974년 긴급조치 1호 당시 군사재판을 받으며 입었던 수의도 전시돼 있다.

▲ 노순택 작가가 1층 유물관을 설명하고 있다. <연윤정 기자>
▲ 노순택 작가가 1층 유물관을 설명하고 있다. <연윤정 기자>

 

‘비정규직 노동자 백기완’ 2층 특별전시관
선생의 마지막 함께한 노동자들 직접 준비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는 민중의 역사 속 백기완 선생의 삶을 보여주는 사진과 글을 기록했다. 2층 특별전시관은 1년에 두 번 백기완에 얽힌 다양한 주제를 잡아 특별전으로 진행한다는 콘셉트다. 개관특별전은 ‘비정규직 노동자 백기완’이다.

재단은 “백 선생이 한살매(인생)의 마지막 20년을 보낸 젊은 벗들은 빼앗기고 쫓겨나고 내몰린 비정규 노동자, 하늘로 오르고 곡기를 끊고 땅바닥을 기고 목숨을 끊어 저항하던 해고 노동자들이었다”며 “그 눈물겨운 투쟁과 연대의 장면이 알려지지 않았던 뒷이야기와 함께 전시된다”고 소개했다. 특히 특별전은 비정규 노동자와 활동가들이 직접 꾸몄다고 한다.

2011년 2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항의하며 영도조선소 내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던 김진숙 전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1차 희망버스를 타고 백기완 선생이 찾아갔던 사진도 전시돼 있다. 이번에 최초 공개되는 것이라고 한다.

박점규 이사는 “1차 희망버스가 도착했지만 못 들어가던 중 공장 안에서 사다리가 나왔는데 백 선생님이 사다리를 타고 담 안으로 들어갔다”며 “선생님이 옥상으로 올라가자 용역경비들이 뒤로 빠졌고 선생님이 손들고 연설하는 모습”이라고 소개했다.

2018년 겨울 태안화력발전소 사내하청 청년노동자 김용균이 야밤에 홀로 일하다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다. 백 선생은 거리에 나서 “용균이는 돈밖에 모르는 이 사회가 학살했다”고 투쟁했고, 그의 영결식에서 “용균이를 땅이 아닌 가슴에 묻겠다”고 말했다.

노순택 작가는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가 직접 와서 아들의 사진을 액자에 끼웠다”며 “콜트·콜텍, 기륭전자 등 당사자들이 못질하고 붙이고 하며 함께 전시를 준비하고 마지막 청소까지 마쳤다”고 설명했다.

▲ 2층 특별전시관 모습. <연윤정 기자>
▲ 2층 특별전시관 모습. <연윤정 기자>

 

백범사상연구소에서 백기완마당집으로
‘한 돌 쌓기’ 마음 6천831명 동참으로 완성

백기완마당집 역사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 이름을 빌려 백범사상연구소를 열었다. 분단독재 유신체제에 맞서 싸우기 위한 ‘둥지’를 틀었다고 재단은 표현했다. 1984년 연구소 이름을 통일문제연구소로 바꿨다. 1988년 ‘통일마당집 한 돌 쌓기’ 운동을 벌여 노동자·민중,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1991년 현재 위치의 오래된 살림집을 매입해 연구소가 자리했다. 2021년 백 선생이 별세한 뒤 다시 ‘한 돌 쌓기’의 마음으로 3년간 모금하고 공사한 끝에 현재의 백기완마당집을 열었다. 당초 명칭을 백기완기념관으로 하려고 했다가 유가족과 이사진, 집행부들이 이름을 공모해 백기완마당집으로 최종 귀결됐다.

백범사상연구소부터 통일문제연구소까지 백기완 선생과 가까이 했던 유홍준 석좌교수는 “선생이 살아계실 때 이렇게 고쳐 놓고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우리가 어떻게 이 집을 잘 활용할 것인가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쳐 백기완마당집이 완성됐으며,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 삶이 살아 있는 민족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명진 스님은 “백 선생은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변혁운동가이자 한국문화 이정표인 문학인이기도 하다”며 “제가 조계종 문제로 단식하고 투쟁할 때 와서 위로해 주고 도와주신 분으로 제게는 아버지 같은 스승이셨다”고 회고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기록을 정리한 손호철 명예교수는 “우리나라는 특별히 잘된 노동자기념관이나 민중운동관이 없다”며 “백기완마당집을 만들면서 민중운동사를 백기완 연보와 같이 만들면 백 선생의 정신을 잘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1층 '노동해방꾼' 백기완의 기록. <연윤정 기자>
▲ 1층 '노동해방꾼' 백기완의 기록. <연윤정 기자>
▲ 2층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와 백기완. <연윤정 기자>
▲ 2층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와 백기완. <연윤정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