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와이퍼 청산 이후 노동자들의 재고용과 지역 취약노동자 지원 등 사회적 고용기금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재단이 상반기 안에 설립된다. 회사 청산과 한국 사업 철수를 일방적으로 발표해 대량해고 논란에 휩싸인 한국와이퍼 사태는 지난해 8월 노사가 사회적 고용기금 마련에 합의하며 일단락됐다. ‘한국와이퍼 모델’은 외투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묻고 공장 담벼락을 넘어 지역사회 연대기금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19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국와이퍼 사회적고용기금 의미와 활용방안 토론회’에서 (가)안산사회적 고용기금 설립 및 운영 방안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토론회는 지난해 9월부터 기금운영 관련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구성된 논의기구인 ‘한국와이퍼 사회적 고용기금 운영 준비위원회’ 주최로 열렸다.
한국와이퍼 사태는 2022년 7월 사측이 금속노조 한국와이퍼분회와 총고용 보장 합의 이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일방적으로 합의를 파기하면서 촉발했다. 한국와이퍼는 자동차 부품업체인 일본 기업 덴소가 100% 출자해서 1987년 설립한 회사다. 한국와이퍼분회는 덴소 본사 방문을 위한 일본 원정투쟁과 덴소 한국 계열사인 덴소코리아 화성공장 앞 집회 등 한국 사업 철수와 기업 청산을 실질적으로 결정한 덴소의 책임을 묻기 위한 투쟁을 진행했다. 이후 고용노동부 안산지청과 한국와이퍼 노사 포함 덴소와이퍼·덴소코리아가 참여하는 5자 테이블이 마련돼 합의점을 도출하게 됐다.
조합원 설문조사, 기금 마련엔 ‘동의’ 참여는 ‘유보’
이날 토론회에서 정흥준 서울과기대 교수(경영학)는 지난해 12월 금속노조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 159명을 대상으로 사회적고용기금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발표했다. 조합원 10명 중 7명은 노조가 사회적고용기금을 요구한 것에 동의(69.6%)했고, 기금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재단설립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동의(72.3%)했다.
그런데 정작 기금 사업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통’이라는 중립적인 의견이 47.8%로 가장 많았다. ‘긍정 의견’은 30.2%, ‘부정 의견’은 22%였다. 기금 마련이나 재단 설립 자체에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재단 사업에 참여할지를 두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정흥준 교수는 “구체적인 사업 미정, 재취업 불안정 등으로 기금 참여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보였는데 향후 조합원의 자발적인 참여를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단 사업과 관련해 1순위는 ‘조합원을 위한 교육사업’(75.5%)이 꼽혔다. ‘해고노동자 지원사업’ ‘신규 조직화 사업’ ‘불우이웃 돕기 등 사회공헌 활동’이 뒤를 이었다.
‘뚜벅이재단’ 5월 창립총회
지속가능성 과제 … “정부 지원, 노조 참여 필요”
준비위측은 고용기금 운영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도 제시했다. 우선 재단법인 형태로 운영될 기금의 명칭은 ‘뚜벅이재단’으로 정해졌다. 최윤미 전 한국와이퍼분회장은 “청산 반대 투쟁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덴소코리아 화성공장에서 국회까지 걸으면서 덴소에 대한 국정감사를 요구했다”며 “덴소 규탄 뚜벅이로 이름을 짓고 뚜벅이 투쟁을 진행했는데, 당시 앞이 보이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결국 그 투쟁의 결과로 덴소코리아 사장을 국정감사에 세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힘들고 막막해 보여도 반드시 길을 만들어 가자는 의미로 뚜벅이재단이라는 명칭을 택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재단은 다음달 초 창립총회를 열고 6월께 개소식을 한다는 계획이다. 재단 사업은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 고용지원사업 △취약노동자 지원사업 등을 추진한다. 재단은 조합원 욕구 조사를 정기적으로 진행해서 다양한 소그룹을 조직하고 교육훈련 네트워크를 형성해 청산 이후의 삶을 모색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최윤미 전 분회장은 “한국와이퍼 해고노동자들은 평균 52세 여성으로 재취업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며 “해고노동자를 지원하는 것은 지역 취약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지속가능성은 과제다. 현재 재원(초기 자산 24억원)의 이자 수입만으로는 법인 운영을 이어 가기 어려운 탓에 기금 확대를 위한 방안 모색도 필요하다. 노사합의로 기금 출연, 개인 후원,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정흥준 교수는 기금 확대를 위해 노조의 기금 출연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지역사회의 연대기금이 되려면 노조의 참여가 필요하다”며 “노사가 임금·단체협상을 할 때 임금인상분에서 일부를 노조에서 재단에 내면, 사측도 지출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산업전환 시기 산별 고용안정체계 구축해야”
오기형 금속노조 정책국장은 “산업전환시기 산업구조에 많은 재편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특히 해외 생산자산 비중이 높은 일본 자본의 철수가 빈발할 것”이라며 “전 산업적으로 진행되는 재편 과정에서 기업별 노사관계를 넘어 산별 고용안정 체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금이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윤유진 평등평화세상 온다 교육팀장은 “제조업 쇠퇴로 노동환경 악화와 고용불안이 심화하는 가운데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해 해고노동자 생계 지원, 노동자 직업전환교육, 이직 지원을 포함한 고용지원서비스 등 안산지역 노동자를 위한 고용·노동복지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