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산화하신 지 49년이 지났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봉제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12일 오전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 이정기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장은 "봉제노동자들은 아직도 주 6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으며, 4대 보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증언했다.
옛날 어린 시다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재봉틀을 돌렸던 비좁은 복층 공장은 깔끔한 간판을 단 평화시장으로 리모델링됐다. 하지만 봉제노동자들의 장시간·저임금 노동 구조는 별반 다르지 않다.
70~80년대 같은 영세 사업장 노동자 현실
1970년대와 80년대 작업장을 방불케 하는 현장은 또 있다. 평화시장에 근접한 한국 귀금속의 메카 종로 귀금속 거리다. 종로에는 1천개 이상의 공장과 매장이 있다. 보석세공 종사자들은 1만명에 달한다. 원석을 깎고 다듬어 화려한 주얼리를 만드는 보석세공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김정봉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종로주얼리분회장은 "매장이나 AS공장은 5명 미만, 제조는 10명 이상 사업장이 대부분"이라며 "근로계약서 안 쓰고 퇴직금 안 주고 4대 보험 가입 안 하는 것은 5명 미만 사업장이나 10명 이상 사업장이나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주얼리 업체들이 종로에 밀집해 있고, 도제시스템으로 돌아가다 보니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이직을 위해 피해를 감수하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정기 지회장과 김정봉 분회장 말처럼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2천219만5천82명) 26.5%(587만7천128명)가 일하는 5명 미만 사업장 노동 현실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촉구하며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49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근기법 조항 가운데 연차유급휴가·생리휴가·초과근로수당·휴업수당 지급 조항과 부당한 해고·징계·인사발령 제한, 직장내 괴롭힘 방지 같은 주요 내용은 5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소규모 사업장 지불능력과 법 준수능력을 감안해야 한다는 명목에서다.
하지만 대다수 사업주들과 얼굴을 맞대며 일하는 영세 사업장의 노동자일수록 불합리한 상황에 쉽게 노출된다. 이들에게 근기법을 온전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최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가 5명 미만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의 권리찾기에 방점을 찍고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잘못된 현실을 바꿔 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1년 앞둔 올해는 근기법 사각지대를 없애는 법·제도 개정과 노동자 권리찾기 운동에 나설 적기다.
민주노총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작은 사업장 노동자 권리찾기' 집중
구체적인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대표를 맡은 '권리찾기유니온 권유하다'는 지난달 초 창립발기인대회를 열고 '권리찾기 1천일 운동'을 선포했다. 5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와 임시직·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같이 노동권리가 취약한 노동자에게 근기법을 적용하자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도 작은 사업장 노동자 권리찾기에 시동을 걸었다. 민주노총은 이날 오전 서울 청계천 전태일다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태일 열사 50주기인 내년 11월까지 1년간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슬로건을 내걸고 사업을 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산하 조직이 함께하는 공동사업단을 주축으로 △근로기준법 누릴 권리 △평등하게 쉴 권리 △알 권리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알리는 공동캠페인을 전개한다. 이를 내년 총선에서 의제화하는 법·제도 개선 투쟁을 병행한다.
김경자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은 "일터 크기에 따라 권리 크기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며 "전태일 열사의 외침을 기억하는 노동·시민·사회단체와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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