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속노조 대우조선지회 조합원들이 지난 8일 낮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동종사 매각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죄가 있다면 그저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습니다."

회색 작업복을 입고 '생존권 사수'라고 적힌 붉은 머리띠를 맨 김충구(55)씨는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얼굴을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김씨는 열아홉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용접기술을 배워 대우조선해양에 입사했다. 그 뒤로 28년간 조립2부에서 용접을 했다. 산업재해로 1년간 일을 쉬었던 그는 2013년부터 지원직인 공무운영팀에서 용접 관련 수리를 하고 있다.

"35년간 별일 다 봤죠. 김우중 회장이 망하고 정부에서 내려보낸 사장이란 사람들이 대우조선 돈을 다 빼 갔습니다. 우리는 3년 전까지 고통분담을 한다고 월급 10% 반납하고, 회사 살린다고 300만원으로 주식도 사고 그랬어요. 이제 조금 수주도 받고 흑자를 보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회사를 매각한다고 합니다. 너무 괴롭고 힘드네요."

결혼해 자식 둘을 낳아 시집 보내기까지 가족의 울타리가 됐던 회사였다. 김씨는 6년 남은 정년을 채울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정도기술부 소속 추재영(가명)씨는 2014년 입사자다. 추씨 입사 후 신입사원을 뽑지 않아 5년이 지난 지금도 신입사원으로 불린다. 추씨가 신입딱지를 떼지 못한 건 2015년 시작된 대우조선해양 위기와 맞닿아 있다. 당시 해운·조선업 침체로 선박수주가 줄어들고 저가수주 경쟁으로 수익성이 악화했다. 정부는 대우조선해양에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분식회계 사실까지 드러났다. 전직 사장들과 산업은행 회장이 사법처리됐다. 여론은 싸늘했다.

"입사하자마자 안 좋은 소식만 들렸어요. 여론에 몰매 맞고, 어디 가서 대우조선 다닌다고 말도 못했죠."

2015년 상반기 3조2천억원 영업손실을 낸 이후 3년반에 걸친 혹독한 구조조정 과정을 겪은 대우조선해양은 2017년 6년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지난해에도 흑자를 이어 갔다. 추씨는 "입사 후 좋은 꼴 한 번 못 보다가 이제 겨우 어깨 좀 펴려고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저는 매각 반대합니다. 고생해서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현대중공업으로 팔려 가면 회사 이름도 없이 '현대중공업 하청업체'에서 일하게 되는 거잖아요."

 

▲ 정기훈 기자

"대우조선해양 매각되면 경남지역 폭망"

대우조선해양 신입사원부터 30년 넘게 기름밥 먹은 베테랑 노동자까지 각자가 생각하는 매각반대 이유는 차고 넘쳤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 모인 이들은 저마다의 울분을 담아 산업은행을 향해 목청을 높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산업은행과 현대중공업은 이날 대우조선해양 민영화 본계약을 체결했다.

현대중공업과 산업은행은 이날 공동발표문을 통해 △대우조선해양 자율경영체제 유지 △노동자 고용안정 △협력업체·부품업체의 기존 거래선 유지 보장 △이해관계자 공동협의체 구성 △학계·산업계·정부 참여 '한국조선산업 발전협의체' 구성을 약속했다.

약속을 믿는 노동자는 없었다. 거제시의원·경남도의원을 거쳐 2013년 현장에 복귀한 김해연(54)씨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고 했다. 그는 "기껏해야 1~2년 정도 아니겠냐"며 "고용안정도 물량이 있어야 고용안정이지,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한국조선산업 발전협의체 구성 약속과 관련해서는 "조선산업이 발전하려면 매각을 안 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 노동자와 거제시민들에게 '고용안정·협력업체 유지'는 부도난 약속어음 같은 허망한 소리다. 벌써부터 구조조정 1·2·3순위가 어디라는 소문이 횡행한다. 선박영업·기술·총무·인사·연구·설계 같은 조직은 0순위로 꼽힌다.

▲ 정기훈 기자

협력업체 유지 약속도 다를 바 없다. 대우조선해양 사내 기자재업체는 120여개다. 거제·창원·양산 등 경남지역에 산재한 협력업체는 1천200여개다. 사내업체와 사외업체에 각각 1만5천여명, 7만여명의 노동자가 일한다.

협력업체들에 대부분 물량을 발주하는 대우조선해양과 달리 현대중공업은 수직계열화돼 있다. 현대중공업은 기자재 80%를 그룹에 속한 계열사에 준다. 외부업체에 물량을 줄 리 없다. 지금은 협력업체를 유지하더라도 얼마 못 가 계열사로 물량을 줄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독점체제에 따른 협력업체들의 종속화가 심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업계 전반이 현대중공업으로부터 단가인하 강요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대우조선해양 매각이 거제지역 전체 문제로 비화하면서 '대우조선해양 매각 문제 해결을 위한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이날 상경투쟁에 함께한 이광재 거제범시민대책위 집행위원(거제경실련 집행위원장)은 "지금 어떤 것을 약속하더라도 결국에는 경영합리화 차원에서 인력을 자르고, 일감은 울산으로 가져가고, 대우조선 특수기술은 다 빼 갈 게 불을 보듯 뻔하다"고 말했다.

경남도의원을 지낸 이길종 거제범시민대책위 집행위원도 "장사치가 장사하면서 지역주민이나 노동자 위해 장사하는 거 봤냐"고 반문했다. 그는 "현재 옥포조선소 도크에 95% 물량이 있는데, 현대중공업은 60%밖에 없다"며 "당분간 두 회사 체제를 유지한다고 해도 결국 좋은 물량은 다 가져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광재·이길종 집행위원은 "대우조선해양 매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면서도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 정기훈 기자

"옥포조선소 5개 문 막겠다" 실사저지 투쟁 돌입

금속노조 대우조선지회(지회장 신상기)는 현대중공업 실사를 막는 2단계 투쟁을 예고했다. 조재영 지회 부지회장은 "대우조선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현대중공업이 빼 가지 못하도록 서울사무소와 옥포조선소를 막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수대를 꾸려 옥포조선소 5개 문을 봉쇄해 실사단 진입을 막겠다는 것이다. 지회는 이달 4일 서울 다동 대우조선해양 서울사무소 앞에 천막을 쳤다. 조 부지회장은 "본계약을 체결해도 앞으로 수개월이 걸리는 기업결합심사가 남아 있는 만큼 오늘 도장을 찍었다고 끝난 게 아니다"고 말했다.

신상기 지회장은 "현대중공업 자본과 산업은행의 발표문은 종이 쪼가리에 불가하다"며 "지역과 연대해 정권와 산업은행, 현대중공업이 매각을 포기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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