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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노동문제 연구자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에드워드 웹스터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15일 저녁에 이뤄졌다. 그는 2001년 11월 경기도 광주에 자리한 한국노동교육원에서 열린 남반구노조연대회의(SIGTUR)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남아공 역시 노동의 유연화가 고용관계의 변화를 초래하면서 노동시장과 노사관계, 노동조합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남아공의 대표적인 비정규직으로는 계약직(기간제) 노동자를 들 수 있으며, 노점상 같은 비공식부문의 근로계층이나 실업자 역시 그 수가 엄청나다. 남아공의 노동조합들은 비정규직과 (비공식부문) 취약 근로계층의 확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고용관계의 변화가 정규직 노동자에 기반한 노동조합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상황이다."
- 남아공의 노동조합은 산별노조 체계인데, 비정규직이나 취약 근로계층의 조직화와 보호에 적극 나서고 있는가?
"말로는 적극적인데, 쏟아낸 말만큼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다. 노동시장과 고용구조를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중심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특히 정규직 노동자들은 조직하기가 쉬운데 노동조합이 여기에 만족하는 경향이 크다. 중심부의 비정규직이나 주변부의 취약근로계층까지는 노조가 챙기지 못하는 실정이다. 물론 모범 사례도 있다. 코사투 산하 섬유노조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원단을 가져다 집에서 박음질을 하는 섬유산업의 최하층에 자리한 중년의 여성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산별노조 체계가 (기업별노조보다) 비정규직이나 취약계층의 조직화에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기업별 체계를 뛰어넘은 조직 형태는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지 그 자체가 도착점은 아니다."
-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에서 산별교섭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남아공의 산별교섭 사정은 어떤가?
"업종별 교섭위원회(Sectoral Bargaining Council)가 전국적으로 110개 정도 있는데, 그 가운데 1/3 정도가 단체교섭과 단체협약의 체결이라는 자기 기능을 다 하고 있다. 교섭위원회를 통한 교섭은 기업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진행된다는 점에서 초(超)기업 교섭이라 할 수 있지만, 산업 전체를 포괄하는 본격적인 산업별 교섭의 수준은 아니고 산업 안의 업종별로 이뤄지는 수준이다.
물론 금속노조(NUMSA)와 금속사용자협회가 참여해 교섭하고 협약을 체결하는 금속산업 교섭위원회처럼 산업별 교섭에 가까운 활동을 벌이는 교섭위원회도 있기는 하다. 반대로 남아공 경제에서 가장 비중이 큰 광산업의 경우 아직 교섭위원회가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전국광산노조(NUM)가 개별 기업들과 일종의 대각선 교섭을 벌이는 수준인데, 올해 안으로 교섭위원회를 출범시킨다는 원칙에 노사가 합의한 상태다."
- 그렇다면, 교섭위원회를 통해 체결된 단체협약은 교섭위원회에 참여하는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에게만 적용되는가?
"단체협약 내용은 교섭위원회에 교섭 대표로 나서는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물론, 교섭위원회가 포괄하는 부문에서 일하는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들에게도 당연히 적용된다. 사용자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용자단체를 통해 교섭위원회에 참여하는 기업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해당 부문의 기업에게도 단체협약은 적용된다. 노동조합이 없는 중소영세사업장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얘기다. 물론 이들에게는 해당 부문의 교섭위원회에서 체결된 단체협약이 최저기준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볼 때 개별 사업장에서 단체협약이 지켜지는 지 여부를 누가 감시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세 군데에서 단체협약을 감시한다고 보면 된다. 첫째는 중앙정부의 부처인 노동부가 감독관을 통해서 감시한다. 둘째는 교섭위원회가 자체 대리인을 통해 감시한다. 마지막으로는 개별 사업장의 현장위원들(한국으로 치면 단위노조 간부나 대의원)이 감시한다."

- 단체교섭의 진행은 물론 협약의 준수여부를 감시하는 따위의 상당히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는 교섭위원회에 대해 설명해 달라.
"노사가 함께 만든 자율적(voluntary) 조직인 교섭위원회는 해당 산업 혹은 부문의 산별노조와 사용자단체가 교섭을 진행하고 협약을 체결하며, 마지막으로는 협약의 준수여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새로 생기는 교섭위원회가 있다면, 제 역할을 못하고 문을 닫는 교섭위원회도 있다.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금속산업 교섭위원회의 경우, 자체 상근 직원만 100명이 넘으며, 금속노조(NUMSA) 출신 인사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노사 양측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교섭위원회는 단체협약에 따른 각종 연기금(의료, 실업, 퇴직금 등)을 운영하며, 교섭위원회의 재정은 사용자 분담금과 노조 분담금에서 충당하는데 사용자 분담금 비중이 훨씬 큰 편이다."
- 한국도 보건의료노조, 금속노조, 금융노조가 산별교섭을 하고 있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특히 사용자단체 구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사용자 단체와 관련한 남아공의 사정은 어떠한가?
"초기업 수준의 교섭이 노조에게만 이롭다면 사용자가 나설 리 없다. 기업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업종별 혹은 산업별 교섭에서 사용자가 챙길 것이 있어야 한다. 기업별 교섭을 포함한 모든 교섭의 기본 원칙은 주고받는 것(trade-off)이다. 자본주의 계급 사회에서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하거나, 받기만 하고 주지 못하거나 하는 교섭은 존재할 수 없다. 업종별 혹은 산업별 수준에서 기업의 틀을 뛰어넘는 교섭위원회를 통한 단체교섭의 역사는 20여 년 전인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노조 내부에서 논쟁이 있었다. 현장의 전투성을 훼손한다느니, 노조가 관료화된다느니 하면서 사실상 기업 틀을 뛰어넘는 단체교섭을 거부하는 흐름이 있었으나 대세를 거스르진 못했다.
교섭위원회의 법률적 기원은 1924년 산업관계법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고, 당시부터 백인 노동자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산업별·업종별 교섭이 이뤄져왔다. 흑인노동조합이 기업의 틀을 뛰어넘는 업종별 교섭위원회를 요구하고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반부터고, 민주화 이후인 1995년 새로운 노동관계법을 만들면서 인종과 지역을 뛰어넘는 교섭으로 발전하였다."
- 기업별 교섭이 아닌 교섭위원회를 통한 산업별 혹은 업종별 교섭에서 사용자단체가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규모의 경제'가 이뤄지면서 교섭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이것은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80년대 초반 흑인노동조합들이 교섭위원회를 요구했을 때 사용자들은 반대했었다. 하지만, 업종별 교섭이 자리를 잡으면서 기업들 사이의 '불공정 경쟁'이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업종별 단체협약이 소수 기업이 아닌 관련 기업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이나 저임금 같은) 노동자의 희생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기업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노동자에게도 좋지만 사용자에게도 좋은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자 처우의 개선이 노사간 대화의 합리적 구축은 물론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개별 기업이 떠안을 경우 기업에게는 큰 부담이 되면서 사회적으로는 이중삼중의 중복 비용을 치르게 만드는 직업훈련과정이나 각종 연기금(퇴직, 실업, 의료)의 운영을 산업 혹은 업종 차원에서 공동으로 관리·운영하는 데서 얻게 되는 이익도 무시하지 못한다."

- 한국에서는 산업별 혹은 업종별 교섭으로 가면 노조 조직이 현장성을 잃게 되면서 관료화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교섭틀·교섭규모의 확대와 노조의 관료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제가 일하는 위츠대학교 노동사회학과(SWOP)는 올 초 금속노조(NUMSA)의 현장위원들이 모여 금속산업교섭위원회에서 다룰 사안을 미리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한 적이 있다. 현장에서 모인 300명이 넘는 단위노조 활동가들이 함께 교섭의 전략을 짜고 전술을 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노조 민주주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논의 결과를 자기 회사의 동료 조합원들에게 보고하고, 그 과정에서 수렴한 조합원들의 의견을 다시 노조에 보고할 것이다. 기업별교섭에서 이런 수준의 활동이 가능한 지 되묻고 싶다."
- 노사관계의 분권화가 세계적 추세라는 주장도 있는데 남아공에서의 산별교섭의 전망은?
"노동조합이나 조직 노동자들이 교섭위원회(Bargaining Council)를 통해 노동문제를 풀어간다면, 아직 노동조합이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들은 정부의 노동분쟁 중재기관인 조정위원회(CCMA)를 찾아간다.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교섭위원회 틀 안에 통합하는 게 노동조합의 주요 과제가 되고 있다. 사용자 그룹에서 노동시장의 유연화 추세에 발맞춰 교섭의 분권화(기업별 교섭)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큰 호응은 얻지 못하고 있다. 업종별 혹은 산업별 교섭은 해당 산업의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노동자들에게는 고용의 안정성을, 사용자들에게는 경영의 안정성을 높여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강한 노조와 강한 사용자단체가 동시에 필요하다. 노조는 사용자에게 합의한 이상 파업은 없다는 믿음을 주어야 하고, 사용자는 노조와 합의한 사항은 꼭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믿음은 힘에서 나오지만, 힘이 처음부터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남아공 노동운동이 교섭위원회를 통해 초기업별 교섭을 시도한 지 20년을 훨씬 넘어서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노동운동이 기업 수준의 타협은 용인하면서 산업 혹은 전국 수준의 타협은 부정한다면 노동조합 조직은 산업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활동 기반을 잃게 되면서 기업 울타리에 갇힌 '실리적 조합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길게 볼 때, 이런 현상은 기업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남아공 정부는 전국 수준에서 이뤄지는 노사 교섭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20년 넘게 축적된 경험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남아공의 노사간 교섭은 업종 수준을 넘어 산업 수준으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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