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부터 2008년 3월까지 삼성디스플레이 천안사업장에서 일한 고 여귀선씨(사망 당시 39세)는 2021년 9월19일 추석을 이틀 앞두고 유방암으로 숨졌다. 2017년에 유방암 진단을 받은 여씨는 2019년 12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지만 하염없이 길어지는 역학조사 탓에 최종 결과를 모른 채 눈을 감았다. 결국 여씨는 사망 4개월 뒤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를 승인받았다.

여씨처럼 산재를 신청한 뒤 역학조사가 진행되는 도중 숨진 노동자들이 산재를 인정받는 비율이 연도별로 최소 절반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8년 동안에는 10명 중 7명에 가까운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가 업무상 질병 산재 처리기간 단축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역학조사 대폭 축소 방안을 조속히 실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박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근로복지공단에서 받아 8일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8년부터 올해 8월까지 141명의 산재신청 노동자들이 역학조사 도중 숨졌고, 이 중 66%가 사망 뒤 산재를 인정받았다.

연도별로 보면 2019년 역학조사 기간 중 사망한 노동자 8명이 모두 산재를 인정받았다. 2020년(82.4%)과 2018년(77.8%), 2021년(75%)에도 산재인정 비율이 높았다. 가장 낮았던 지난해에도 52.2%의 노동자들이 역학조사 기간에 숨진 뒤 업무와 질병 간 상관관계를 인정받았다.<표 참조>

산재인정 가능성이 높은데도 역학조사가 길어지면서 자신이 왜 질병에 걸렸는지, 산재에 해당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숨지는 노동자가 적지 않은 것이다. 여귀선씨의 남편은 아내가 숨지기 한 달 전 근로복지공단에 보낸 편지에서 “아직까지 역학조사가 끝나지도 못하고 (산재신청 뒤) 1년8개월이란 시간이 흘러갔고 그 사이 아내의 병세는 악화했다”며 “아내를 생각해서 부디 산재 판정을 서둘러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질병에 걸린 노동자가 산재를 신청해 인정받으려면 의료기관의 특별진찰, 연구기관의 역학조사,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등 절차를 거쳐야 한다. 현재 특별진찰을 하게 되면 166.3일, 역학조사를 하면 604.4일이 추가로 소요된다.

박해철 의원이 근로복지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역학조사를 수행하는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과 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기간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2020년 275.2일이었던 직업환경연구원의 건당 역학조사 기간은 지난해에 588.8일까지 증가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같은 기간 441.4일에서 699.8일까지 늘었다.

전체 조사건수 대비 완료 비율은 2020년 49.5%, 2021년 41.9%, 2022년 38%, 2023년 54.4%, 지난해 44.3%로 한 해만 빼고 50%를 밑돌았다. 역학조사 의뢰가 쏟아지고 조사기간도 길어지면서 제대로 소화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부는 지난달 1일 발표한 ‘업무상 질병 산재 처리기간 단축방안’에서 광업 종사자의 원발성 폐암, 반도체 제조업 종사자의 백혈병 등 질병과 유해 물질 간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연구·조사가 충분히 이뤄져 업무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 역학조사를 의뢰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공단의 재해조사를 거쳐 판정위원회에서 업무관련성을 심의받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박해철 의원은 “특별진찰과 역학조사 대폭 축소 같은 정부의 대책이 조속히 추진돼야 할 필요성이 입증됐다”며 “노동자가 자신이 왜 병에 걸렸는지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하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지체없이 대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