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집배원 과로사 사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 우정사업본부 노사합의로 폐지됐던 ‘집배업무강도 진단시스템’이 5년 만에 현장에 재도입된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일고 있다. 업무량 조정이라는 본래 목적과 달리 업무평가에 악용돼 집배원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안겼던 제도가 복원되자, 여전히 높은 수준인 집배원의 재해율이 다시 치솟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정 노사 “열악한 관서 인력 산출기준 필요해”
1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9월1일부터 집배업무강도 진단시스템을 다시 시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시스템은 ‘소포당 7초’같이 업무별 소요시간을 산출해 업무량을 계산한다. 업무량 격차를 평준화하려고 도입했지만 개인평가에 이용돼 부작용이 일었다. 우정노조와 우본은 진단시스템이 과로사 배경으로 지목되자 2020년 폐지에 합의했는데, 이를 5년 만에 다시 도입하기로 했다.
공공운수노조 민주우체국본부는 진단시스템 폐지를 촉구하며 8월부터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농성하고 있다. 본부는 진단시스템 재도입으로 가뜩이나 높은 집배원 재해율이 더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교섭대표노조인 우정노조는 이번 노사합의가 일부 우체국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이라는 입장이다. 도서산간지역 등 일손이 시급한 관서에 증원하려면 인력을 산출할 근거가 필요했고, 과거의 기준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노사는 또 이번 합의로 업무 소요시간을 산출할 때 정성적인 요소를 도입하기로 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등 과거 시스템보다 현장 노동실태를 더욱 잘 반영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우정노조 관계자는 “공공기관이라 인력 산출기준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도서산간지역이나 농촌지역은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산출기준을 폐지할 때 대책이 없다”며 “노사협의로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우정사업본부는 본지에 “교섭대표노조인 우정노조와 합의해 현 집배 상황에 맞게끔 도입을 결정했고 개선이 진행 중”이라며 “앞으로도 외부용역 등을 통해 현장 상황을 잘 반영할 수 있도록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민주우체국본부 “현장직 집배원, 업무당 표준시간 불가능”
반면 민주우체국본부는 진단시스템 완전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집배업무강도 진단시스템은 ‘부하량산출시스템’으로도 알려졌다. 이 시스템은 집배원 업무를 81개로 쪼개 단위업무별 표준시간을 규정한다. 표준시간 이행 여부에 따라 개인의 부하량과 업무량이 계산된다. 쿠팡도 비슷한 개념을 사용한 적 있다. 물류센터 과로 노동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던 쿠팡은 노동자 1명이 1시간에 몇 개 물건을 처리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시간당 생산량(UPH·Unit Per Hour) 시스템’을 활용했다. 관리자는 통신기기로 노동자의 실시간 UPH를 파악하며 업무를 독촉했고, 2020년 10월 고 장덕준씨 사망 등 과로사 문제가 발생하자 UPH를 폐지했다고 밝혔다.
갈등은 우체국에서도 일어났다. 우본은 관서별·개인별 업무량 격차를 조정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했다고 밝혔지만, 일부 우체국은 부하량 결과에 따라 당초 취지와 달리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등의 업무평가로 활용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실태조사 결과 게시판에 부하량을 게시해 집배원 간 경쟁을 조장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은 산출된 부하량과 업무량을 납득하지 못했다. 산출 방식도 공개되지 않아 실제 업무량과 연관관계를 검증하기 어려웠고, 개인의 과로지수와 부하량 간 상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김효 민주우체국본부 부위원장은 “집배원이 실내에 앉아서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날씨나 도로 등 다양한 변수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데 업무별 표준시간을 부여한다는 것이 가능하냐”며 “실제 결과를 봐도 현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다. 표준시간만 보면 우리는 쉼 없이 일해야 한다. 기계도, 로봇도 이렇게 돌리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진단시스템은 여러 차례 폐지·개선대상으로 지목돼 왔다. 정부는 2017년 집배원 과로사가 연이어 발생하자 기획추진단을 꾸려 노동조건 개선 방안을 조사했다. 노·사·전문가로 구성된 기획추진단은 2018년 보고서를 발간해 진단시스템이 과로사 배경이라고 지적하며,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자세히 짚었다.
추진단은 진단시스템이 실제 집배원 업무량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휴식시간이나 여유시간을 반영하지 않았고, 기후나 배달 난지역 같은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도입 목적과 달리 업무평가와 업무조정을 놓고 직원 간 갈등의 원인이 됐기 때문에, 활용 원칙을 마련하고 제도 개선시 노조 참여를 보장하라고 권고했다.
우정노사가 2020년 시스템 폐지에 합의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우본은 2021년 연구용역을 통해 새로운 시스템 도입을 검토했지만 노사 논의 끝에 새로운 시스템이 기존 시스템보다 더 큰 한계를 보여 도입을 보류하기로 했다. 여기에 인력 산출기준 필요성이 커지자 끝내 과거 시스템을 재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우정노조 관계자는 “진단시스템의 미흡한 점은 모두가 공감하지만, 인력배치나 증원을 위해 표준화할 필요성이 있었다”며 “인력이 부족한 우체국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이 같은 합의가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부하량 측정? 업무 과부하 원인 겸배부터 폐지해야”
진단시스템을 둔 논란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우체국본부는 농성과 함께 각 우체국별로 1인시위, 항의방문 등을 진행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이훈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우정사업본부 집배원 산재는 2천88건이 승인됐다. 2023년 기준 집배원의 재해율은 3.76%로, 산업 평균 재해율 0.65%의 5배에 달한다. 올해 7월 집배원 결원(정원대비 현원)은 344명으로 인력부족 문제도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우체국본부는 우본이 표준시간을 활용해 개인별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체국 단위로 평가를 개선하되 현재와 같은 진단시스템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근본적으로 과로의 원인이 되는 겸배(팀원이 자리를 비울 때 동료 집배원이 대신 배달하는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결원시 배달을 수행할 대체인력 확보를 요구하고 있다.
김효 부위원장은 “우본은 표준화를 위해 진단시스템을 도입했다고 하지만, 진단시스템을 근거로 충원이 이뤄진 적은 없다”며 “진단시스템은 사쪽이 입맛대로 표준시간을 조작할 가능성도 높다”고 지적했다. 김 부위원장은 “현장에서 부하량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겸배이고, 현장 집배원의 고충도 겸배 문제로 인한 노동강도 증가”라며 “시스템을 폐지하고 겸배가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집배원 과로 대책의 우선순위”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