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기상캐스터 오요안나씨가 동료들의 집단 괴롭힘으로 고통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차라리 회사를 그만 뒀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가정이기 때문이다. 고인은 이미 ‘터널 비전’에 갇혀있는 상태였을 테니 말이다.
캄캄한 터널 안을 달리다 보면 오로지 터널 밖 작은 불빛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처럼,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돼 우울한 상태가 지속되면 죽음 이외에 다른 대안을 떠올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과연 무엇이 노동자들을 고독한 죽음의 질주로 떠미는 것일까. <무사안일> 스물다섯 번째 사연은 우리 사회 ‘자살 산재’ 논의에 대한 고찰이다.
‘업무상 자살’ 노동자 연평균 최소 500명
통계청 ‘2023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1만3천978명이 한 해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한국의 연령표준화 자살률은 10만명당 24.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이 가운데 직무스트레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경찰의 변사사건 처리결과를 집계한 ‘경찰청 자살통계’에 따르면 직장이나 업무상 문제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 자살건수는 연간 400~500건 정도다. 하지만 실업이나 임금체불·산재로 인한 육체적 질병, 정신적 또는 정신과적 문제가 중첩돼 사망한 인원까지 포함한 노동자의 실제 자살건수는 보다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직무스트레스는 심각한 유해·위험요인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근무지에서의 심리·사회적 요인, 즉 직무스트레스가 노동자의 지각과 경험을 통해 건강에 위험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직무스트레스가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사회적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해 왔다.
그렇다면 직무스트레스란 무엇일까. 미국 산업안전보건연구원(NIOSH)은 직무스트레스를 “직무요건이 노동자의 능력(capabilities)이나 자원(resources)·바람(needs)과 일치하지 않을 때 생기는 유해한 신체적·정서적 반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업무량은 많은데 이에 대한 통제권이 없을 때 △요구되는 업무량은 적은데 통제권도 없어 불만족과 무력감이 높아질 때 △업무에 쏟은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보상이 적을 때 직무스트레스가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보상은 금전이나 고용안정 같은 직업적 기회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정 같은 자존감도 포함한다.
당사자 죽고 없는데 업무관련성 입증하라니
직무스트레스는 뇌·심혈관계 질환을 비롯한 육체적 질병과 우울·소진(burn-out)·트라우마 같은 정신건강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지지나 원인 규명 노력 같은 적극적 중재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자살이나 과로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직무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노동자가 자살하는 경우 산업재해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37조2항은 “근로자의 고의·자해행위나 범죄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돼 발생한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은 업무상의 재해로 보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같은 항 단서를 통해 “그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이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뚜렷하게 낮아진 상태에서 한 행위로 발생한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가 있으면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고 산재 인정의 길을 열어 두고 있다.
문제는 다른 산재 사건과 마찬가지로 자살 산재도 재해의 업무 관련성을 주장하는 측, 즉 유족에게 입증의 책임이 부여된다는 점이다. 피해 당사자가 부재한 상태에서 남은 유족이 죽음의 경로를 되짚어야 하는 잔인한 구조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자살 산재승인율은 2020년 65.3%, 2021년 52.3%, 2022년 45.2%, 2023년 41.1%로 낮아지는 추세다.
이와 관련 노동법 학계에서는 노동자 자살 사건에 대한 ‘추정의 원칙’ 도입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전형배, 2020; 정슬기 2024). 유족이 사망한 노동자가 업무상 과로 또는 스트레스 상태에서 자살행위를 한 사실만 증명하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쪽에서 관련 사항을 입증하도록 산재보험법을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와 유사한 규정으로 공무원재해보상법 4조의2(공무상 재해의 인정 특례) 조항이 있다. 해당 조항은 “유해하거나 위험한 환경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 공무수행 과정에서 상당기간 유해·위험요인에 노출돼 질병에 걸리는 경우와 그 질병으로 장해를 입거나 사망한 경우에는 공무상 재해로 추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같은 법 시행령에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질병으로 근골격계 질병,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직업성 암과 함께 정신질환을 명시하고 있다.
민주당의 자살골 ‘반도체 특별법’
노동자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직무스트레스는 노동과정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직장갑질119가 2019~2021년 업무상재해로 승인된 자살 산재 판정서를 분석한 결과, 분석 대상 161건 가운데 ‘과로로 인한 죽음’(중복 사유 포함)이 58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 밖에 ‘징계 및 인사처분’(52건), ‘직장내 괴롭힘’(48건), ‘폭행’(7건), ‘성희롱’(7건)이 뒤를 이었다.
2010~2016년 산재 신청자료를 분석한 또 다른 연구결과에서는 관리자·전문직의 자살사망 산재신청 비중이 컸다. 세부 사유를 보면 △업무의 양과 질(업무 내용이나 업무량의 급격한 변화, 근무시간 증가, 시간적 압박) △과중한 책임(업무상 사건·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 경우, 신규 사업 담당, 심리적 압박)이 사망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장정원, 2019). 전문직에게 관행적으로 적용되는 재량근로시간제 등이 과로 위험을 높이고, 연쇄적으로 자살 가능성까지 키운 것으로 해석된다.
연봉 수준이 높은 전문직이나 금융권 종사자의 과로자살 문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유럽국가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받은 만큼 토해 내라’는 압박은 만국 공통인 셈이다. 이 대목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반도체특별법’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다 싶어 법안 통과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려는 국민의힘은 말할 것도 없고, 우클릭·중도확장 운운하며 기존 노동시간 단축 기조에 스스로 흠집을 내고 있는 민주당도 한심스럽긴 마찬가지다. 반노동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무적 감각까지 의심스럽다.
특별법이 겨냥한 반도체업계 연구개발직은 과로자살 취약군인 고연봉 전문직이다. 이들의 정치성향이 진보라면 민주당은 집토끼를 잃게 될 것이다. 이들의 정치성향이 중도라면 ‘대놓고 총질’하겠다는 정당에게 표를 줄지 의문이다. 또한 이들의 정치성향이 보수라면 애당초 민주당을 찍을 이유가 없다. 조기 대선이 가시권에 들어온 현 시점 정치권 최대 쟁점이 고작 ‘노동시간 늘리기’라니. 고임금 전문직에 대한 시샘 여론에 매달려 보겠다는 정치권의 계산적 행태는 저급하고 저열하다.
일환경건강센터 PL (tokki79@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