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갑자기 응급실에 가서 이튿날 연차휴가를 신청했어요. 그랬더니 양가 부모님 가족관계증명서랑 재직증명서를 가져오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부모님 재직증명서와 가족관계증명서를 갖다줬어요. 그랬더니 관리자가 친정 부모님은 재직증명서를 왜 안 떼왔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엄마는 93세이신 할머니를 돌보느라 일도 안 하고 우리 애도 돌볼 수 없다고 했더니 할머니 치매 진단서를 떼 오라더군요.”
7일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항공노조가 제보받은 사연이다. 한 객실 승무원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회사에 연차휴가를 요구하자 회사가 양가 부모님에게 아이를 맡기라며 각종 서류를 요구한 사례다. 연차휴가뿐만 아니라 생리휴가·가족돌봄휴가 등 노동관계법에서 지정한 각종 법정휴가가 제한되고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노조는 “아시아나항공의 휴가 제한으로 가정을 돌보지 못한 승무원들의 사직이 속출하고 있다”며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제기했다.
승무원 5명 중 1명은 연차휴가 하루도 못 써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항공노조(위원장 권수정)는 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노동부 서울남부지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노조는 이날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회사를 처벌해 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서울남부지청에 접수했다.
승무원들은 인력부족으로 현장에서 휴가 거절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대표 진정인으로 나선 25년차 객실 승무원 유미선(47)씨는 “연차휴가를 20~30번 신청해도 하루 휴가를 제대로 받기도 힘들고 번번이 거절만 당한다”며 “휴가 거절 사유조차 알려주지 않아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챙기기가 힘들다”고 호소했다.
이런 현실은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났다. 노조는 지난달 7일부터 30일까지 아시아나항공 객실 승무원 193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 했다. 응답자의 98%가 휴가 거절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올해를 기준으로 응답자들은 평균 8~9회를 거절당했다. 응답자들의 근속연수는 평균 15.1년으로 올해 부여된 연차휴가는 평균 20.5일이었다. 그런데 연차휴가를 하루도 쓰지 못한 이들이 22.3%로 가장 많았다. 하루를 썼다는 이는 17.1%, 이틀을 사용한 사람은 14.5%에 불과했다. 응답자 중 183명이 생리휴가를 신청한 경험이 있었는데 이중 38.3% 이상이 1회 이상 생리휴가를 승인받지 못했다. 가족돌봄휴가를 신청한 사람은 14명뿐이었고 이중 42%는 회사가 거절한 경험이 있었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현장 만들어야”
노조는 인력부족에서 기인한 노동강도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권수정 위원장은 “유럽 항공사의 경우 승무원의 월평균 비행시간이 70시간 수준인데 비해 우리는 100시간에 육박한다”며 “방사능 피폭량도 상당한데 쉬지도 못한다. 여성이 많이 일하는 만큼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군, 현장을 만드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조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승무원 사직자만 120명에 달한다. 노조는 사직의 주요 원인을 ‘인력부족→휴가 제한과 높은 노동강도→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어려운 현실과 건강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김음표 공인노무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연차휴가 사용 시기와 여부는 노동자가 자유롭게 결정해야 하고 회사는 휴가 사용을 강제하거나 변경·거부할 수 없다”며 “아시아나항공은 노동자의 연차유급휴가권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을 의무, 부작위 의무를 위반해 근기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노조의 설문조사는 전체 약 3천300명 캐빈(객실) 승무원 대비 설문 참여 인원이 193명에 불과해 정확하게 반영된 수치로 보기는 어렵다”며 “캐빈 승무원의 스케줄 편성은 직급·교육이력 등 자격요건에 따라 편성되는 직종의 특성상 탄력적인 운영에 다소 제약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사는 원활한 인력운영을 위해 올해 상반기부터 국내외 캐빈 승무원 채용을 진행해 왔으며, 앞으로도 캐빈 승무원의 연차 사용 및 스케줄 변경 기회 확대를 위해 노력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