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현필 국제민주연대 사무국장

한국NCP 오욕의 역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1976년에 다국적기업이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1970년대는 다국적기업 횡포와 인권침해가 국제사회의 심각한 문제였다. OECD가 뭐라도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거세지면서 가이드라인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가이드라인은 다국적기업에 아무런 압력도 되지 않았다. 1990년대 다시 다국적기업 인권침해 문제가 불거지면서 OECD는 가이드라인을 개정하고 국가연락사무소(National Contact Point)를 설치해 NCP가 갈등 진정을 받아 처리하도록 했다. 국제사법적인 절차는 아니다. 하지만 국가가 설치한 기관에서 다국적기업 노동분쟁 사안을 다루는 길이 열렸다는 측면에서 NCP는 주목을 받았다.

한국NCP는 2000년 설치됐다. 2001년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에 NCP가 설립된 이후, 한국NCP에는 40건이 넘는 진정이 제기됐다.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기업에서 발생한 노동자 해고와 노조탄압 사건이 주를 이룬다. 물론 국내에서 활동하는 다국적기업에 대한 진정도 제기됐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NCP는 설립 이래 23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의미 있는 권고를 내린 적이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한국NCP 제 역할을 못하는 이유

우선 한국NCP 구조와 운영에 노조와 시민사회의 참여가 보장되지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엔(UN), OECD까지 개선을 권고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 둘째, 위원 구성의 한계다. 한국NCP는 정부위원 4명(산업통상자원부 2명·고용노동부·환경부 각 1명)과 민간위원 4명으로 구성돼 있다. 정부위원 4명은 가이드라인에 대한 전문성이 없다. 뿐만 아니라 기업에 부담을 주는 권고나 조치를 취하지 않으려 한다. 민간위원 역시 산업부가 결정하는 구조라 책임 있는 활동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셋째, 사무국 운영이 대한상사중재원이란 민간기관에 맡겨져 있다. 이런 구조는 전 세계 51개국의 NCP 중 한국이 유일하다. 넷째, 역할에 대한 적극적 의지가 없다. 그러니 소극적이고 부실한 조정절차가 반복된다.

한국NCP 규정은 진정 접수 후 3개월 내 사건을 검토해 1차 평가를 실시하고, 1차 평가 후 조정절차를 개시해 1년 내 진정에 대한 최종성명을 발표하도록 했다. 한국NCP는 2016년에야 처음으로 1차 평가를 통해 조정절차를 시행했다. 이후에 제기된 몇몇 진정에서는 조정절차가 있었다. 하지만 NCP 최종성명에 해당 기업의 어떤 부분이 가이드라인에 미흡했고, 개선이 필요한지를 지적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한국NCP의 현주소다.

조정절차 개시부터 빨라야

한국NCP는 기로에 섰다. 지금처럼 기업들에 가이드라인 홍보만 하는 껍데기 기관으로 남을 것인가. 지난 2일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가 한국NCP에 진정을 제출했다. 한국옵티칼이 노조에 사전 통지나 협의 없이 해고절차를 진행하고, 노동자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려는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진정서에는 한국옵티칼의 본사인 일본기업 닛토덴코와 이 회사로부터 납품을 받아온 LG디스플레이를 피진정인으로 지목했다. 가이드라인과 NCP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누구나 쉽게 판단 할 수 있는, 명백한 사안이다. 외국에서 발생해서 사실 확인에 시간이 걸린다는 핑계댈 일도 없다. 280일 가까이 두 명의 여성노동자가 고공농성을 하며 곧 겨울을 맞이한다.

한국NCP는 조정절차 개시부터 빨라져야 한다. 만약 지금처럼 1차 평가에서 진정을 기각하거나 조정절차를 개시하더라도 구경꾼 입장에 머문다면 한국NCP는 마지막 남은 존재의의를 보여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꼴이 될 것이다.

한국NCP에 진지하게 요청한다. 한국NCP가 왜 존재하는지를 보여줄 때가 됐다. 첫 시작은 한국옵티칼 사례다. 한국NCP 위원들이 구미에 내려가서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기를 강력히 요청한다. 그런 일을 하라고 국민 세금으로 한국NCP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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