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노예계약 하러 가요”

취업했다는 얘기를 이렇게 해서 웃었지만 자꾸 되새기게 된다. 비교적 젊은층에게 이런 표현을 듣는다. 오랫동안 일자리가 중요한 의제였고 지금도 불안정한 노동이 늘어난 현실에서 취업은 축하할 일이다. 생계 불안으로 일자리가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취업이 중요하지만, 취업을 열심히 준비하는 젊은층에게 특히 취업은 축하받을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런 표현을 쓸까.

진짜 노예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취직은 몸 자체가 주인의 소유가 되는 노예와 다르다. 근로계약은 몸을 파는 것이 아니다. 몸이 아닌 노동할 능력을 사용자에게 파는 것이다. 하지만 몸과 노동력은 뗄 수 없어 직장서 통제를 받는다. 기업에 인격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일시적으로 시간적 공간적 종속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근로계약이다.

노예계약이라는 말이 이런 사회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노예계약을 맺으러 간다는 것은 취직했다는 것을 알리는 얘기다. 열악한 일자리에 취직하면 노예계약이라는 표현이 사실적인 것에 가까워 오히려 이런 표현이 조심스럽지만, 좋은 일자리도 노동력을 팔고 기업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취업의 기쁨과 통제당할 신세를 뒤섞은 유머로서 이런 표현에 가볍게 웃을 수 있다.

주인으로서 계약

직장을 갖는 것은 임금을 받아 생계를 해결하게 되지만 동시에 기업에 속박되는 것이다. 사용자의 통제를 받지만 동시에 저항할 조건을 획득한다. 취직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자에게 저항하고 요구할 수 없지만 취직하면 동료와 뭉쳐 저항할 수 있다. 노예에게는 인격적 종속만이 있고 저항은 죽음이었다. 노동자에게 노동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지만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저항할 권리가 있다.

근로계약을 노예계약에 비유한다면 단체협약은 주인의 계약이다. 근로계약은 형식적 평등, 실질적 불평등 계약이다. 근로계약을 맺는 노사는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계약 당사자로서 계약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한 다른 선택이 없는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아야 하고, 갓 취직해 근로계약서를 쓰면서 계약조건을 바꿔 달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노동자에게 불평등 계약이다. 단체협약은 노동자들이 뭉쳐서 노동조건을 바꿀 것을 요구할 수 있고, 단체행동을 통해 노동조건을 개선해 협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권리 주인으로서 맺는 계약이다.

민주공화국에서 노예제를 찬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노동자에게 일을 열심히 하라며 노동력 제공 의무만 강조하고, 노조를 비롯한 노동권을 부정하면 그것이 바로 현대판 노예제다.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노동권을 무시하고 노조를 적대시한다면, 현대판 노예제 옹호에 속한다.

노예계약이 아닌 주인으로서 계약을 맺은 경험을 갖거나 그런 계약으로서 단체협약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가 비임금노동자를 포함하면 전체 노동자의 10%를 훨씬 밑도는 현실이 안타깝다. 무엇보다 노동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기관인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가 적대적 노조관을 가지고 있다는 논란에 참담하다. 그것은 시민에게 부여된 시민권을 부정하는 것이고, 민주공화국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자본주의가 노예제로 퇴행하지 않기 위해서 충족해야 할 사회적 계약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진화인가, 퇴화인가

의무와 권리에 대해 균형잡힌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훨씬 다정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균형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노동력을 구매한 기업이 어떤 곳인가.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다. 노동력을 최대한 쥐어짜려 한다. 생산현장에서 기초질서를 강조하면서 통제하며 더 많은 시간에 더 “빡세게” 일하게 해서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는 것이 기업의 속성이다.

저항이 따른다. 의무만 잔뜩 짊어지고 고분고분 일할 사람은 별로 없다. 당연히 권리를 요구하는 저항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삼성그룹에 민주노조가 들어선 이후 이제는 삼성전자 파업도 보게 된다. 역사적인 일이다. 물론 고액 연봉자들의 배부른 파업이라는 비아냥을 넘어설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스스로 노동조건의 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없으면 배부른 노예에 불과하다. 이익보다 훨씬 포괄적인 권리는 돈으로 덮을 수 없다.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할 때 노동자는 늘 저항하며 권리 주체로 등장했다.

저항에는 또 다른 통제방식이 따라온다. 노동자의 권리를 최대한 빼앗고 사용자의 이익을 최대한 키우는 방법은 계속 개발됐다. 대표적인 것이 아웃소싱이다. 이를 통해 비정규직을 넘어서 특수고용직, 플렛폼 프리랜서, 인적용역이라는 요상한 이름으로 3.3% 세금을 내는 비임금노동자를 늘렸다. 단체협약을 맺기 어려운 시민이 늘어난 것이다. 주권자로서 평등한 계약을 맺을 수 없으며 불평등 계약을 감수해야 한다면 과연 동료 시민으로 인정하는 것일까.

골때리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아직 미성숙한 사업주는 불평등 계약을 바란다.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에게 불평등 계약을 요구한다. 역시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다. 강자는 약자에게 불평등 계약을 요구한다. 더 강력한 지배를 위해서다. 클라이언트는 프리랜서에게 불평등 계약을 요구한다.

계약의 원리 훼손은 노조에서도 일어난다. 단체협상은 탐욕에 맞서 권리를 위한 것이지만, 어느새 이익수단으로 바뀐 곳에서 그렇다. 사용자 이데올로기가 노조에 수용된 것이다. 사용자는 자신을 닮은 노조를 예뻐할까.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로봇이 사람을 닮을수록 호감을 느끼겠지만, 사람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에 이르면 으스스한 반감을 느낀다며 이것을 ‘불쾌한 골짜기’라고 불렀다.(브라이언 헤어-베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참고) 이와 좀 다르지만 사용자는 자신을 너무 닮은 노조를 불쾌하게 여기며 귀족노조라는 식으로 맹렬하게 비난해 왔다.

노동시장은 낡은 구도를 이미 벗어났다. 노예계약이라는 근로계약이 없는 노동자들이 대폭 늘었다. 이들은 취직하지 않고 취업한다. 근로계약도 없고 단체협약도 없다. 사용자가 분명해야 단체협약을 맺는데 사용자가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 대응은 노동법 확대 적용이다. 그래서 노동계와 야당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을 밀어붙이고 대통령이 거부했다. 입법안대로 노조법 2조를 시행하더라도 사내하청을 제외하면 노동법 사각지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그래서 변화된 노동시장에 맞는 새 규범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일하는 시민을 위한 새로운 노동법이 필요하다는 것. 하지만 노동법 체계 전환은 노동자 대투쟁을 비롯한 강력한 계기가 없이 이뤄진 적이 없다.

노동권 사각지대에 비해 노동계 대응이 더딘 상태에서 정부여당은 ‘노동약자 지원법’을 얘기한다. 이러다 반노동·반노조 시각을 가졌다고 욕하는 정부와 장관이 오히려 노동권 사각지대의 지지를 받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기성노조의 대응력을 압도할 정도로 정부여당의 계획이 치밀해야겠지만, 브렉시트(Brexit)를 찬성한 영국 노동계급, 트럼프를 지지한 미국의 백인노동자처럼 보수적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사각지대 노동자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칙은 없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은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노동시장에 맞는 결사체, 계약, 규범 개발이라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