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당이 더불어민주당과 새로운진보와 지난 2월21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민주개혁진보 선거연합 합의 서명식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진보당>

 

‘진보정당운동 1기’가 막을 내렸다. 1997년 국민승리21 창당부터 27년간 이어진 실험이, 4·10 총선이 끝남과 동시에 그 수명을 다했다. 진보정당이나 소속 국회의원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1기 실험을 마무리하고 2기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진보정당과 노동계를 포함한 세간의 평가가 그렇다.

정의당은 창당 이후 처음 국회 밖으로 밀려났다. 녹색당은 정의당과 함께했지만 의미 있는 지지율을 확보하지 못했고, 노동당은 존재감이 미미했다. 원외에서 착실히 조직력을 키워 온 진보당은 더불어민주당과 손잡고 의원 3명을 배출했지만, 무너질 대로 무너진 진보정당의 위상을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위기 상황에서는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이 나온다. 동시에 진보정당운동 2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근본적인 질문이 소환되는 이유다. 진보정당들은 진보정당운동 2기 성공을 위해 복원해야 할 정체성으로 ‘노동 중심성’을 내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노동변호사 당대표, 노조위원장 출신 사무총장
원외 굴욕 정의당, ‘노동 색깔’로 재무장

진보정당의 맏이를 자임했던 정의당이 처한 상황은 가혹하다.

원외로 밀려나 의회 권력을 잃었다. 5만명이었던 당원은 최근 줄어들고 있으며 부채만 32억원이라고 알려졌다. 내부에서는 정당으로 기능할 수 있는 요소라는 ‘조직·돈·권력’ 중 아무것도 없다는 자조적 목소리까지 나온다.

정의당 역시 바닥을 치고 올라갈 해법을 노동 중심성에서 찾고 있다. 먼저 인적 구성에서 두드러진다. 단일 당대표 후보로 나선 권영국 변호사는 ‘거리의 변호사’라 불린다. 중대재해, 파리바게뜨 부당노동행위 등 굵직한 노동사건에서 언제나 노동자 편에서 싸웠다. 사무총장을 맡기로 한 나순자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산별노조 운동에 오랜 기간 몸담아 온 전형적인 노조운동가다. 정의당에서 보기 힘들었던 ‘조직노동’ 출신이다. 당직 선거나 공직 선거 때마다 “정의당 후보 중 노동이 보이지 않는다” “노동계 출신을 홀대하고 있다”는 그간 평가를 감안하면 눈에 띄는 변화다.

노동 중심성이라는 것이 이념·정책적으로는 ‘불합리한 자본주의를 노동 중심 사회로 바꾸는 체제 전환’이라면, 인적 구성면에서 노동자와 노동자 정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로 채워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정의당 핵심 관계자는 “21대 총선에서 청년이나 여성이 강조하는 흐름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걸 따라가는 방식으로 (의원단을) 구성했다”며 “그러다 보니 협소하고 왜곡된 의미로 페미니즘 논쟁이 붙으며 노동 중심성이 흐려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현실의 노동자 운동과 긴밀한 연대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표현이 노동 중심성이다”며 “미조직 노동자 권익 향상을 위해서라도 조직 노동운동은 함께해야 조직 노동과의 거리감도 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권 후보는 지난 21일 국회 소통관에서 연 당대표 출마 기자회견에서 “당의 지향과 목표를 분명히 하겠다.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이라는 강령에 맞게 ‘노동 중심성’을 바로 세우겠다”며 노동 중심성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매일노동뉴스>와의 통화에서 “결국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죽거나 무시당하지 않고 제대로 대접받기 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노동자들이 당의 지지 기반을 형성해야 하고 정당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며 “진보정당운동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노동 중심성 강화가 필수”라고 설명했다.

원내 진입 진보당, ‘노동자 직접 정치’에 방점

진보당은 노동 중심성을 “노동자 직접 정치”로 규정한다. 노조를 확대하고, 그렇게 힘을 키운 노조에서 배출한 노동자가 국회에 입성해 노동자를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을 노동자 직접 정치로 보고 있다.

정혜규 진보당 대변인은 “(집권한) 울산 동구청에서 전국 최초로 최소생활 노동시간 보장제, 하청노동자 지원조례를 실시했는데, 이것처럼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현실에서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동 중심성이라는 것은 곧 노동자 직접정치”라며 “노조를 조직해 힘을 키우고 키워진 노조의 힘으로 노동자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진보당이 말하는 노동자 직접 정치는 당의 인적구성에서도 드러난다. 당원 3분의 2 이상이 건설·마트·학교비정규 등 노동자이고, 이들의 목소리를 받아안은 노동자 출신 의원이 정치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22대 국회에 입성한 윤종오(현대자동차)·전종덕(강진의료원)·정혜경(한국소니전자 비정규직) 당선인은 모두 노동자 출신이다. 이렇게 보면 적어도 인적 구성면에서는 진보당이 정의당보다 일찍이 ‘노동 중심성’을 구축해 온 셈이다.

홍성규 진보당 대변인은 진보정당운동의 새 출발 방안에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복원하는 것이고 그런 역할은 진보정치와 진보정당만이 가능하다”며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의 절대다수인 노동자가 원하는 정책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 10석을 얻으며 3당으로 도약할 수 있던 힘이 그런 희망에 있었고, 이를 제시한다면 다시 바람이 불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인물과 정책이 노동 중심성의 전부는 아니다. 정유현 녹색당 전국사무처장은 “노동 중심성이란 노동자 중심 정당, 노동 이슈 중심 정당을 넘는다”며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하는 모든 이들의 서사와 투쟁을 정치적으로 풀어낼 공간을 마련하고, 여러 이슈들과 연결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노동자 중심’ 강조, 다른 가치와 충돌 우려”
“수평적 가치 연대에서 자연스레 리더십 얻을 것”

당사자인 진보정당은 ‘노동 중심성 강화’를 ‘제2의 진보정당운동’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보고 있지만, 외부에서는 우려의 시선도 존재한다. 진보정당의 노동 중심성 강화 움직임은 옳은 방향이지만, 전면에 내거는 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양한 차원의 가치와 지향이 있는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계급적 특권을 전제하고 있고, 다른 진보 의제보다 상위 의제라는 식으로 전달돼 외연 확장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노동과 기후, 페미니즘 등은 충돌하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에서 복합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며 “(노동 중심성을 전면에 걸지 않아도) 5명 미만 사업장 문제, 직장내 괴롭힘과 성폭력, 탈석탄 과정에서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비정규 노동자의 실직 문제 등은 함께 해결할 문제로 자연스럽게 등장한다”고 했다.

손우정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진보적 정치 실천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주체는 노동계급 외에는 없다”며 “진보세력의 공동목표를 수립하는 전략적 입장 속에서 노동계급의 리더십이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했다. 노동계급이 자연스럽게 연대의 주도권을 쥘 것이기에, 다른 가치에 헌신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노동운동으로 시작해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진보신당에 깊이 몸담았던 윤영상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연구교수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노동 중심성 강화라는 구호는 수구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며 “다른 진보적 가치가 공존하는 것으로 가야 하는데, 민주노총 중심과 같은 모습으로 비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지적에 권영국 정의당 대표 후보는 “노동 중심성이라는 게 노동 외 다른 부문을 무시하거나 하자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권 후보는 “사회 전반적인 구성이 시민의식과 노동자 의식으로 분리되고 있지만, 우리 인구 90% 이상이 노동자“라며 ”조직노동과 미조직 노동을 구분하지 않고, 우리 사회 절대 다수가 겪는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이런 논쟁은 진보정당계, 또는 노동운동계에서 해묵은 논쟁·주제이기도 하다. 진보정당이 노동이라는 가치 외에 다양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진보정당이 다양한 진보가치를 추구하다가 상대적으로 노동가치에 소홀히 했고, 결국은 영향력 약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는 엄연히 존재한다. 21대 국회의원 후보에 여성·청년·성소수자 같은 진보가치를 강화하려다가 검증되지 않은 인물을 전면배치하는 바람에 정의당 몰락을 부채질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그간 진보정당이 노동 중심성 강화와 다양한 진보가치 추구 사이에서 적정선을 찾는 데 실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2의 진보정당운동의 열매를 맺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넘어야 할 산 ‘민주당과의 관계’
“노동 중심성 유지하면서 연합해야”

진보정당들이 제2의 진보정당운동 시대를 열고, 독자정당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다.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이다.

지난 4·10 총선은 처음부터 거대 양당 간 격전이었고,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진보정당이 건진 의석은 진보당 3석뿐. 기본소득당(1석)과 사회민주당(1석)을 포함하더라도 민주당 주도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하고 선거연합을 했기에 가능했다. 민주당과 연합한 정당 입장에서는 한 명이라도 국회에 입성해 진보 정책을 펼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혜규 진보당 대변인은 “민주당과의 연합은 (의회에 진출해) 노동자들이 직접 정치를 하고, 노동자들의 삶을 바꾸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진보정당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팬덤 정치 극복, 정치 양극화 해소, 정치의 다원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뼈아픈 결과다.

때문에 총선 뒤 ‘연합정치’에 대한 부정적 기류가 진보정당 내에 형성됐다. 그럼에도 민주당과의 연합 또는 연대를 아예 배제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의회활동이나 노동정책 입법 과정에서 민주당과의 연대를 피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정의당이 그동안 ‘다당제를 통한 연합정치’를 주장해 온 것을 감안하면, 문제는 다당제를 실현하지 못한 것이지 연합 자체는 아니다.

총선 과정에서 민주당과의 연합을 강하게 비판했던 진보정당 관계자들도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정의당 공동대표를 지낸 나경채 양경규 의원실 보좌관은 “민주당이 노동문제의 개선을 걸고 진보정당과 함께하자고 했으면 (연합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정유현 녹색당 전국사무처장은 “노동현실을 바꾸는 정치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가능성을 열고 민주당을 만나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과의 연합이 진보정당운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이고, 노동 중심성을 잃지 않아야 ‘민주당의 위성정당화’를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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