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창원 쿠팡물류센터에 입사한 계약직 사원 김선아(가명)씨는 입사 2주 만에 괴로운 일을 겪었다. 정규직 관리자 A씨가 김씨에게 “눈매가 사납다”며 외모를 평가하고 비하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김씨는 A씨를 직장내 괴롭힘 가해자로 지목하고 본사에 조사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A씨는 김씨에게 “당신이 성소수자인 것을 안다”며 김씨의 정체성을 아웃팅했다. 아웃팅은 성소수자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타인에 의해 정체성이 공개되는 것이다. 김씨는 쿠팡 사측과 고용노동부 창원지청에 직장내 괴롭힘 진정을 제기했으나 사측과 노동부는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 대리인 역할을 한 이민진 공공운수노조 여성부장은 “노동부 매뉴얼이나 쿠팡의 직장내 괴롭힘 처리 매뉴얼에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발언이 직장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다’는 내용이 부재했다“며 “성소수자를 향한 아웃팅 발언이 위계적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제도와 인식에 큰 공백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아웃팅도 직장내 괴롭힘

직장내 괴롭힘이나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일터 문화로 어려움을 겪는 성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직장내 괴롭힘’ 유형에 ‘젠더폭력과 사회적 차별’ 개념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 27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열린 ‘일터내 괴롭힘과 성소수자 노동권 토론회’에서 여수진 공인노무사(직장갑질119)는 “사업장에서 직장내 괴롭힘 사건 처리의 기준이 되는 노동부의 ‘직장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은 직장내 괴롭힘을 개인의 일탈 행위로 접근하며 구조적 괴롭힘 문제는 외면하고 있다”며 “젠더폭력과 같은 차별적 괴롭힘도 직장내 괴롭힘 예시로 적극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토론회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행성인)와 서울노동권익센터가 주최했다.

노동부는 직장내 괴롭힘 매뉴얼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조롱하거나 일상에서 차별하는 것 △개인사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는 것 △집단 따돌림 등의 16개 행위를 괴롭힘의 예시로 제시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행위나 아웃팅 문제는 괴롭힘 행위로 규정돼 있지 않다. 김씨는 괴롭힘 사건 이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진단받았다.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 직장내 괴롭힘 개념을 넓힐 필요성이 제기된다.

우리나라의 노동부와 같은 일본의 후생노동성은 직장내 괴롭힘 행위를 6가지 범주에서 정의하고 있다. 이 중 개인의 사생활 침해 부분에서 ‘노동자의 성적 지향이나 병력, 불임 치료 등 개인정보에 대해 해당 노동자의 양해를 얻지 않고 다른 노동자에게 폭로하는 것’, 즉 아웃팅을 괴롭힘의 한 유형으로 제시한다. 여 노무사는 “일본 정부가 2018년 발표한 표준취업규칙에는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관한 언동 등 다양한 직장내 괴롭힘으로 다른 노동자의 취업환경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사회에서는 성소수자가 평등하고 조화롭게 일할 수 있는 일터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셈이다.

“커밍아웃 할 수 있는 일터 분위기 만들어야”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성소수자들도 직장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행성인은 지난 5월 다양한 직업을 가진 30~40대 성소수자 노동자 6명과 함께 일터에서의 커밍아웃(정체성 드러내기)을 주제로 집담회를 열었다. 교사인 A씨는 학생들이 성소수자를 별칭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며 “스스로가 사회의 이물질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고백했다. 트랜스젠더 노동자의 경우 자신이 선택한 성별로 살아가기 위해 의료적 조치가 필요해도 직장 내에서 병가나 유급휴가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대기업 디자이너인 트랜스젠더 B씨는 연차휴가와 재택근무를 이용해 수술을 견뎠다. 아웃팅이라는 노골적인 괴롭힘을 경험하지 않아도 ‘커밍아웃(정체성 드러내기)’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로 성소수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성소수자 인권단체 다움은 최근 10년간 한국에 거주한 만 19세 이상 만 34세 이하의 성소수자 청년 3천911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직장을 다니는 응답자 1천371명 중 42.5%가 직장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69.5%는 직장에서 성소수자 관련 정책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폭력이나 위협,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돼서 정체성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복수응답)에는 3천911명 중 가장 많은 66.3%가 직장을 꼽았다.

활동가들은 직장내 괴롭힘 개념에 사회적 차별을 포함하는 노력뿐 아니라 성소수자가 동료와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일터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호림 행성인 상임활동가는 “한 설문조사에서 성소수자가 직장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물었을 때, 응답자들은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는 분위기 △성소수자 인권침해·차별에 대한 구제절차나 기구 △직장내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꼽았다”며 “성소수자들에게 일터 내 지지기반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일터에서 성폭력이 발생한다면 가해자를 해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아야 한다”며 “조직에서 성평등 제도를 정착할 방법과 노동자 건강 문제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을 강화할 방법을 모색해 노동환경과 일터를 바꾸는 시도도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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