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오늘 아침 라디오 뉴스쇼 진행자의 첫 멘트는 “정치가 실종됐습니다”였다. 최근 국민의힘 내부의 혼돈을 가리키는 말이다. 새삼스레? ‘뉴스’랄 것도 없이 정치는 실종됐고, 심지어 경멸의 말이 된 지 오래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어디에도 정치는 없다.

조폭 두목이 행동대장에게 보냄 직한 문자메시지로 일어난 소란이 지배하는 여당의 우스꽝스러운 권력다툼, 선거가 끝난 지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다 할 정치적 행위를 하지 못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비례대표들에게 묻는 당원총투표 발의로 혼돈에 빠진 정의당까지. 곳곳에서 “다중권력투쟁”이다. 하물며 우리의 일상이라고 다르겠는가. 요즘 청년 다수는 공동체와 인간관계에서 협잡과 이권 다툼에 치중하는 행위를 “정치질”이라고 칭한다. 정치의 추락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현상이다.

정치가 실종된 시대에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란 무엇이 돼야 할까? 곳곳에서 정치사업의 설계를 재검토하고 토론하는 기획들이 보인다. 가령 지난달 민주노총이 발표한 확대간부 4천명을 대상으로 한 정치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안으로 47.9%가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이 함께 단일 진보정당을 만들어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다. 주어진 보기 중 가장 그럴듯한 문구라 높은 수치를 기록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결과는 사실 큰 의미 값을 갖지 못한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함께 당을 만들려면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문제는 ‘어떻게 해묵은 갈등과 난제를 극복할 것인가’, 그런 방향으로 가는 노정에 어떤 실천이 필요하냐에 있다.

선거연합정당이나 비례정당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취해 그냥 ‘잘’ 하다 보면 될까? 그렇게 되면 비례 순번을 둘러싸고 다시 첨예한 갈등 양상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어물쩡 룰을 만든다고 해도 더 큰 혼돈이 기다릴 것이다. 현재 정의당이 사달난 이유가 여기 있다.

정확한 문제가 있는데도 모른 척 넘어가는 불성실함은 기성 정치권이 자주 보이는 오류와 다르지 않다. 더구나 포퓰리즘적 계기가 폭발하는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대에 상층간부 간 절충으로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빤한 도덕률처럼 인식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여느 때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형철은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다”며,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한다”고 규정한 바 있다. 이는 역사나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우리는 최대한의 근사치를 찾아 실천의 경로를 이야기해야 한다. 대충 얼버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 과거의 과오와 실패에 대중적이고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입장을 발표해야 한다. 뭇노동자들이 지긋지긋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말해야 한다. 가령 다수파는 자신의 패권주의적 행태에 대한 공개 반성문을 써야 하고, 통합진보당 창당과 함께 위험한 도박을 개시했던 주역들 역시 잘못 끼워진 첫 단추에 대해 회고해야 한다. 우리에겐 참혹한 실패로 귀결된 ‘1기 정치세력화’를 애도하는 시공간이 필요하다.

둘, 점차 정파노조화돼 같은 노총 내에서도 경쟁적 관계가 된 노조운동의 쇄신 없이 ‘하나의 정당’은 불가능하다. 정파노조를 강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완화하고 대중운동 속으로 소멸하는 경로에 대해 큰 틀의 합의가 필요하다.

셋, 기후재난과 불평등 시대에 맞선 이행 비전을 논하고 제시할 수 있을 정도의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가령 탄소세 도입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정치인과 체제를 뛰어넘는 기후정의운동을 우선에 둬야 한다고 여기는 활동가들이 같은 정당의 소속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100퍼센트 미제의 음모 때문에 발생했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과 100퍼센트 푸틴의 망상 때문에 발생했다고 단정 짓는 사람들이 같은 당을 만들고 정견을 낼 순 없다. 중국공산당의 노동자운동 탄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과 ‘중국=독재’라는 단순도식을 진리로 여기는 사람들 역시 하나의 입장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입장차를 극복하기 위한 지난한 논쟁이 필요하다.

넷, 일터와 삶에서 구체적인 정치 실천 없이 ‘정치세력화’ 역시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누구도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내놓진 않는다. 현장투쟁이 중요하다는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가장 밑단에서의 구체적 계획과 실천 자체다. 예컨대 지상파 방송3사 노조에는 거액의 파업 기금이 쌓여 있지만, 이들은 미디어산업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 원내 6석의 정의당은 취약한 지역활동을 보완하기 위해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허다하지만 여의도 정치에 대한 모호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조직화’ 없이 정치세력화 혹은 정치적 부활이 가당키나 할까? “가장 확실한 정치세력화는 전략조직화에 있다”고 했던 어느 노조간부의 말은 백번천번 옳다.

이쯤 되면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말이냐’고 반문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온 데에는 진정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 대신 상층 간 타협을 위한 기술적 논의에 집착해 온 지난 15년의 과오가 있다. 상황이 어려워졌으니 일단은 합치고 보자는 식의 작풍은 노동조합과 사회운동 전반에 더 큰 파국을 불러올 뿐이다.

가장 어려운 시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 이미 많은 이들이 단발적으로 과거를 반성적으로 상기해 왔다. 가령 민주노동당에서 소위 ‘자주파’에 속하던 한 인사는 일심회 사건을 떠올리며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던 한 정치인은 당시 탈당이 운동판의 뿌리 깊은 분열을 낳은 것 같아 후회된다고 말했다. 2011년 통합진보당 창당에 함께했던 한 사람은 유시민계와 손을 잡고 위험한 도박을 하자는 설계에 동조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고 했다.

한국의 민중운동은 어쩌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시도를 냉소하고 기각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시도조차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근본적인 치유와 재생을 도모할 때에만 가능성의 빛을 찾을 수 있다. 최근 떠도는 내년 선거연합정당론이 허무맹랑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 많은 준비, 더 장구하고 발본적인 정치 기획이 필요하다.

플랫폼C 활동가 (myungkyo.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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