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일터, 내가 살아 온 날을 기록해 보자. 전문작가의 글처럼 수려하고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나의 삶이 꼭 성공적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삶을 기록하는 자체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사회적기업인 협동조합 은빛기획이 노동자들과 퇴직예정자들에게 글쓰기, 자서전 쓰기를 제안한다. <편집자>
7년 전 고령화 사회의 제반 현상을 살피기 위해 꾸려진 정부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 연수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일본은 가까운 나라고 지인들을 통해서 이러저런 소식들을 챙겨 들을 수 있어서 사전 정보가 없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던 사회 현상들에 대해서는 사전에 열심히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지난 몇 주 동안 이 지면을 통해서 제안하고 있는 생애사 쓰기, 자기 역사 쓰기 프로그램도 그때 꽤 많은 정보를 듣게 됐고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여러 가지를 봤다. 우선 기억 나는 게 로봇이다. 신체기능이 약화한 고령자나 장애인이 걷기, 물건 옮기기, 무거운 것 들어 올리기 등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신체보조기능 로봇이 상당한 정도로 정교하게 개발되고 있었다. 직접 착용해 보니 확실히 실생활에 도움이 될 만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당시만 해도 쉽게 이용하기에는 불편한 게 많았고, 비용 때문에 대중적으로 보급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에 상당히 폭넓게 활용될 것이라는 설명이 허황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 방송을 보니 당시 내가 보고 착용해 본 신체보조기기 로봇이 우리나라에서도 꽤 많이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 본 건 고령세대를 겨냥한, 그들을 주 소비층으로 하는 시장·백화점이었다. 파친코 등 고령자를 주요 고객으로 하는 유흥시설 이용실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구의 30% 가까이가 고령자이다 보니 그들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상권, 서비스 산업이 모색되는 게 당연하다. 도쿄에서 본 고령자들을 위한 백화점은 인상적이었다. 생각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이 길조를 부르는 복장이라고 여겨 고령자들이 많이 입는다는 빨간색 내복이 줄지어 전시된 풍경은 코믹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르면 70대 일본의 고령자층은 가장 큰 자산을 보유한 연령 집단이어서 이런 상권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고령자층의 구매력 역시 작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긴자거리의 파친코에 줄지어 앉아 있는 어르신들, 진지한 표정으로 파친코 기기 레버를 당기는 할머니의 모습 역시 인상적이었다. 두두두두두~~ 칩 쏟아지는 소리에 지켜보는 내가 다 흥분하기도 했다.
엔딩노트, 초고령사회 일본의 대중상품
그때 흔하게 본, 우리에게는 없는 상품 하나가 ‘엔딩노트’였다. 한자로 ‘종활(終活)노트’라고 쓰기도 한다. 현재 삶의 상황, 살아온 삶의 족적, 버킷리스트, 장례·유산·제례 등에 대한 당부 등을 한 노트에 기록하도록 한 생애기록노트다. 웬만한 서점에 들어가 보면 서가 한 편에 수십 권의 엔딩노트가 진열돼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조금씩 다르고 편집도 제각각이지만 ‘엔딩노트’ ‘종활노트’라는 이름을 달고 있고, 같은 기능의 책이다.
그런데 이게 서점에서 판매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여러 자치단체·노인복지관 등에서 조금 간소한 엔딩노트가 무료로 배부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노트까지 치면 수백 종, 수천 종의 엔딩노트가 일본 전국에서 보급되고 있는 셈이다. 그중 일부는 구글 검색을 통해 원고를 확인할 수 있다.
서점에서 판매되고, 자치단체 등에서 무료로 보급하기도 하는 엔딩노트는 분명히 초고령사회 일본에 필요한 상품이어서 보급되는 것이다. 노트 이용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유익하다는 것이고 건강, 재산상태, 노후계획을 설계하도록 돕는 게 기록자의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데 보탬이 되기 때문이라 했다. 치매 노인의 집에서 유류품 처리 등으로 생활 쓰레기를 버릴 때 쓸려 온 수천만 엔의 돈다발이 쓰레기 처리장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심심치 않은 실정에서, 인지능력이 있을 때 그런 삶의 조건을 기록하도록 돕는 것이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보충 설명도 들었다.
쓰는 방법? 펜을 잡고 키보드를 친다!
생애사 쓰기 프로그램을 설명하면, 관심을 보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책 한 권을 어떻게 쓰냐”고 슬그머니 발을 뺀다. 글 한 편, 책 한 권은 쓰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선 앞에서 설명한 엔딩노트를 우리 식으로 재구성한 ‘인생노트’로 기록해 보는 게 가장 쉬운 접근일 수 있다. 인생노트도 결국은 기록이다. 삶을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고 앞일을 내다볼 수 있게 한다. 노트 한 권을 따라서 기록하다 보면 글을 쓸 동기가 생긴다. 짧게 쓰다 보면 이어서 쓸 힘이 생긴다. 무엇보다 글을 쓸 수 있는 소재, 이야기 거리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걸 잡으면 되는 일이다.
요즘에는 대화를 녹취하는 프로그램이 적지 않게 보급돼 있다. 조용한 찻집에 앉아 두 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녹음했다가 풀면, 순식간에 활자로 전환 시켜준다. 따라 읽으며 발음이 분명하게 인지되지 못한 오탈자만 바로잡으면 대화 전체가 복원되고, 맥락과 문맥을 다듬으면 글로 바뀐다. 과거 대여섯 시간 동안 진행한 회의를 녹음테이프 돌려 가며 하루 종일 풀어서 회의록을 작성하던 일은 이제 옛일이 됐다. 글쓰기에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글쓰기를 돕는 이가 있다면 적당한 질문으로 도울 수 있다.
은빛기획이 생애사 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운용하는 방안도 소개할 수 있겠다. 교육 진행자가 제시하는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기록하면 자동으로 작은 글 한 편이 완성되는 메뉴얼이다. 아날로그 방식의 쳇GPT라고 부를 만하다. 고치고 다듬으면 자신의 글이 된다. 쳇GPT 활용은 다른 이들이 소개하니 굳이 재론하지 않으련다.
책 한 권은 분량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이 꼭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전하고 싶은 뜻이 있는가가 문제일 뿐이다.
책을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보고 들은 바,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제 직면하게 된 질문, “은퇴 후 평균 40여년을 사는 시니어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건강도, 소득·자산도, 여가생활 계획도, 가족관계나 커뮤니티 지지자 모임도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런데 그중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자존감이 아닐까 한다. 자기 삶에 대한 긍정, 스스로에 전하는 위로야말로 어깨 펴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내다볼 수 있게 하는 기본 토대다. 더 의미 있는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런 자존감을 채우는 자기 노력의 하나가 생애사 쓰기다. 다 이루지 못한 것, 뜻대로 되지 않았던 건 기록으로 갈음하면 될 일이다. 쓰고 나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토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된다.
동년배 친구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내 생각으로 전한다.
“세상에는 책을 쓴 사람과 쓰지 못한 사람, 두 부류가 있대. 그건 새로운 세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