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중고차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던 빗장이 풀렸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 17일 중고차판매업을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지정하지 않기로 의결하면서다. 정보 비대칭에 시달리던 소비자가 환영하고 있지만 중고차 시장 종사자들의 얼굴은 어둡다. 국내 시장점유율이 90%에 육박하는 신차 시장처럼 중고차 시장도 머지않아 현대자동차·기아에 잠식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딜러 연소득 2천만원 수준인데…”
매집물량 감소 우려에 ‘발 동동’

중소벤처기업부의 결정으로 완성차 제조사의 중고차 시장 진출은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는 지난 7일 중고차 시장 진출 의지를 명확히 하며 이미 밑그림을 공개했다. 출고된 지 5년, 주행거리 10만킬로미터 이내 자사 브랜드 차량 중 엄격한 품질검사를 통과한 차량(인증중고차)만 선별해 판매하겠다는 안이다. 자체 품질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차량은 경매 등 방식으로 중고차 시장에 공급한다. 현대차는 기존 업계와 상생하기 위한 방안으로 2022년(2.5%)부터 2024년(5.1%)까지 시장점유율을 자체적으로 제한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하지만 현대차가 내놓은 상생안은 당장 생계위협을 느끼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기는 역부족이다. 조덕현 서비스일반노조 경기도중고차딜러지회 부지회장은 “현대차가 말하는 5년·10만킬로미터 이내 완전 무사고 차량은 매장에 전시된 중고차 수량을 기준으로 40%가 넘고, 매매 금액으로는 전체 시장의 70% 수준”이라며 “중고차 딜러들의 소득이 연 2천만원정도인데 현대·기아차가 이 시장의 절반을 가져가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중고차 시장 종사자의 먹을거리 감소는 불을 보듯 뻔하다. 중고차를 매집하는 방식은 직거래·경매장·신차영업소 등으로 나뉘는데 이 중 신차영업소를 통해 나오는 매물은 사실상 현대차·기아가 독점할 수 있다. 이강희 ㈔전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 부장은 “(제조사가 시장에 진출하면) 신차영업소에서 나오는 물건은 앞으로 확보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현대차·기아는 자신들이 사 놓고 마음에 드는 것은 취득하고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준도매로 판매하겠다는 건데 판매할 상품이 아니라면 매집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고객이 타던 차량을 매입하고 신차 구매시 할인을 제공하는 ‘보상판매 도입’과 맞물리면 고객은 중고차를 신차영업소를 통해 판매할 유인이 늘어날 수 있다.

중고차 가격이 인상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구자균 금속노조 케이카지회장은 “수입차 브랜드도 자기네 중고차를 팔면 신차를 할인해 준다고 하고서, 중고차 시세를 조종하는데 현대차·기아도 그렇게 될 확률이 크다”며 “미끼매물이 없어진다고 하지만 가격이 인상돼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자리 축소·노동질 하락 우려”

조덕현 부지회장은 “현대차가 영업인력, 블루핸즈(현대차 공식 서비스 협력사), 현대글로비스의 ‘오토벨(중고차 플랫폼)’ 등 여러 잉여자산(혹은 인프라)을 갖고 있는데 이를 이용해 영업을 확장해 기존 매매시장을 흡수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장기적으로 중고차 시장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장이 될 가능성도 크다. 공개된 중고차 시장 진출 계획을 보면 현대차는 영업인력이 없이도 운영 가능한 ‘온라인 원스톱 쇼핑’ ‘가상전시장’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중고차를 살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도 구축할 계획이지만 무인으로 운영돼 산업 유지에 필요한 인력은 계속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의 질 악화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구자균 지회장은 “현대글로비스는 정직원이 몇 명 되지 않고, 대부분 업무는 외주를 준다”며 “온라인 판매한 뒤 중고차 진단업무, 탁송업무 모두를 외주 주면 양질의 일자리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은 “현재는 중고차 시장만 이슈가 되고 있는데 중고차 시장이 완전히 열리면 정비업도 손보자고 할 것”이라며 “상생안에 대해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모여 합의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전문정비연합회는 2019년 4월 중기부에 자동차 정비업을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조 부지회장은 “딜러만 전국에 6만5천명 정도로 추산되고, 관련 업종까지 포함하면 30만명 정도인데 이 사람들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다”며 “중고차 딜러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가 살아가는 세상 속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으로 이해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현대차·기아뿐만 아니라 르노코리아와 한국지엠 등 자동차 제조사와 롯데렌탈·SK렌터카 등 대형 렌터카사들도 시장진출 계획을 밝혔거나 검토 중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