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익찬 변호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최근에 기자들로부터 자주 연락을 받았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됐는데도 왜 현장은 그대로냐는 것이다. 여기서 ‘그대로’의 정확한 의미는, 기본적인 조치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대로’라는 것이다. 기자들 중 상당수는 취재와는 무관하게, 반복되는 현실이 개인적으로도 참 답답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서초동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서면이나 쓰는 필자에게 묘안이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이 지면을 통해서 오늘도 여러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지들이 해 온 말을 그대로 전하고자 한다.

알 권리, 참여할 권리, 거부할 권리가 보장돼야 노동자가 안전하다. 먼저 노동자가 현장의 위험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교육받아야 한다. 알 권리가 보장된 상황이라면, 지금 현장의 작업방식이 위험한 경우에는 사업주에게 의견을 내서 이를 안전하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참여할 권리). 바꾸지 못한다면, 위험한 작업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거부할 권리).

사업주가 알아서 안전하게 작업지시를 할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없다. 사업주가 무슨 악의가 있다기보다는, 노동자 안전에 ‘무관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떻든 사업주가 무관심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몸은 노동자가 스스로 지켜야 한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노동자와 사업주가 사랑하는 관계도 아니고 옛날 표현대로 ‘가족’도 아니다. 서로 처한 입장이 다르므로 노동자의 몸은 누가 대신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되고, 스스로가 지켜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행 산업안전보건법도 단순히 정부에 의한 규제와 처벌만 두지 않고 노동자의 알 권리, 참여할 권리, 거부할 권리를 여러 조문에서 보장하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타령하는 의견이 원론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하나마나한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감독만으로 현장의 안전이 지켜진다고 믿는 것이 더 비현실적이다. 근로감독관 숫자를 10배로 늘리더라도 모든 사업장의 모든 위험요소를 365일 감시할 수는 없다. 감독관이 365일 감시를 하지 않아도 안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곧 사업주가 알아서 법을 지킬 것이라는, 아무도 진실된 것이라고 믿지 않는 비현실적인 명제로 돌아가게 된다.

또 노동자 권리보장 없이 정부에 강력한 권한만 준다고 해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의 입장에서는 그 규제권력만 매수하면 되므로, 그것보다 더 손쉬운 장사는 없다. 그 부처 출신 공무원을 기업 임원으로 모셔 가서 컨설턴트나 로비스트로 활용하는 등 관피아 자리만 더 많아질 위험이 있다. 또 규제권력이 강해지는 과정에서, 유관기관들이 규제 목적과는 동떨어진 숙원사업을 달성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노동자 권리에 관한 논의가 빠진 대책은 비현실적이고 비효율적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말은 모든 노동자를 근로감독관으로 만들자는 말과 같다. 조장풍 같은 감독관이 우리 사업장에 와 주길 기다리기보다는, 노동자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자는 것이다.

고 이선호 님의 경우 제대로 된 안전교육을 받았고 작업중지권이 보장됐더라면 ‘신호수가 없고, 컨테이너 날개의 안전장치도 부실하니까 작업을 못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300킬로그램 파지더미에 깔려 사망한 고 장창우님은 그 작업의 위험성을 알았고 심지어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 위험한 작업을 바꿀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설령 사업주가 안전을 위해 아무런 돈을 쓰려 하지 않더라도 노동자가 알 권리, 참여할 권리, 거부할 권리를 온전히 행사할 수만 있다면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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