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비정규직티브로드지부는 지난 7일 서울 중구 SK남산빌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탄력근로제를 강행하는 SK브로드밴드 기술센터를 규탄했다. <자료사진 정소희 기자>

단체협약에 따라 연장근로시간을 규정하고 있는 사업장에서 취업규칙으로 탄력근로제를 도입한 것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일까? 노동자 과반수나 과반수노조의 동의 없이 취업규칙을 바꿨다면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절차를 위반한 것일까? SK브로드밴드 협력업체가 취업규칙을 바꿔 2주 단위 탄력근로제를 도입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11일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비정규직티브로드지부에 따르면 ㈜원케이블솔루션은 이달 14일부터 취업규칙을 개정해 2주 단위 탄력근로제를 도입한다고 지난 8일 공지했다. 원케이블솔루션은 SK브로드밴드 기술센터(옛 티브로드 기술센터)를 운영하는 협력업체다. SK브로드밴드 하청업체 노동자 900명 중 600여명이 근무한다. 하청업체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연장수당 회피 위해 도입했는데 단체협약 지켜질까”

지부와 원케이블솔루션이 포함된 협력업체협의회는 단체협약을 통해 매달 35시간의 연장근로를 인정해 왔다. 노동자들이 상시적으로 평일 1시간, 격주 주말마다 7시간씩 연장근로를 했기 때문이다. 지부에 따르면 사측은 의견청취 면담자리에서 탄력근로제를 도입해도 단협대로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면서 탄력근로제를 도입할 까닭은 찾기 어렵다. 탄력근로제 자체가 ‘수당 없는 연장근로’를 위해 도입되기 때문이다.

최성근 지부 미조직부장은 “사측이 당장 단체협약을 어기기 어렵겠지만, 이후 탄력근로제와 단체협약이 충돌하는 부분을 카드로 삼아 근로조건을 개악할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노동자들에게 있다”며 “사측은 연장근로수당 지급에 대한 정확한 설명과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탄력근로제를 강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진수 공인노무사(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는 “탄력근로제 도입 후 근무시간표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임금 감소 여부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탄력근로제 도입 목적이 사업주로서는 연장근로수당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 그 점을 이용한다면 임금이 감소할 위험은 분명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단협이 취업규칙에 우선해 적용된다”며 “단협에서 포괄임금 형식으로 월 35시간의 고정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도록 돼 있다면 취업규칙이 변경됐다고 해도 사용자의 수당 지급의무는 남게 된다”고 덧붙였다.

사측 “불이익 없는 취업규칙 개정” 주장

손 쓸 도리 없는 노동자

노조가 지적하는 또 다른 문제점은 이번 취업규칙 개정의 절차적 문제다. 2주 단위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려면 취업규칙을 작성하거나 변경해야 한다. 변경된 취업규칙은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신고한다. 취업규칙을 변경할 때는 노동자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하고, 불이익한 변경일 경우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하다. 노동자에게 불이익한 부분이 없으면 의견청취만으로 도입할 수 있다. 근로자대표와 서면합의를 요구하는 3개월 이상 탄력근로제보다는 낮은 수준의 도입 절차를 거치는 셈이다.

불이익 정도는 근로자의 실근로시간 및 근로시간대의 변동 정도, 임금보전 수준, 근로조건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사측은 이번 탄력근로제 도입이 근로조건의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아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동의 절차 없이 노조 의견청취 절차만 진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노조는 △야간·연장근로에 따른 과로 △실질임금 하락 우려 △도입 절차의 정당성을 문제 삼아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노조로서는 취업규칙 개정을 막을 방도가 마땅치 않다. 사용자 의지로 취업규칙이 개정됐지만 실제 근무시간표가 나와 임금 하락 등의 취업규칙 불이익 여부를 판단하기까지 문제제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부는 추후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이 있다는 판단을 하면 법률적 대응을 검토할 예정이다.

사측은 취업규칙을 먼저 개정하고 근무시간표 등의 세부사항은 나중에 고지하겠다는 전략을 내놓았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3월 발표한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규정의 주요내용’에 “제도별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유연근로제를 도입하고, 취업규칙 등에 세부 운영규정을 마련해 노사 간 다툼의 여지를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명시했지만 처벌 규정을 두지는 않았다.

최진수 노무사는 “취업규칙에 ‘탄력근로제를 도입할 수 있다’고만 규정하고 이를 근거로 사업주가 곧바로 탄력근로제를 운영할 수 있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공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탄력근로제를 시행했다는 점에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의 절차상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부는 탄력근로제 도입으로 야간·연장근로가 늘어날 것으로 우려한다. 전봇대에 올라가 작업하거나 맨홀 속으로 들어가는 전송망 직군의 노동자들은 야간 긴급출동이 잦다. 탄력근로제를 시행하면 긴급출동이 더 빈번해질 가능성이 높다.

최성근 부장은 “SK브로드밴드 협력업체에서 대부분 나타나는 문제는 인력부족 때문”이라며 “전송망 직군은 관리자 없이 1인 출동으로 야간작업을 진행해 산업재해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 노무사는 “근로기준법상 노사가 합의해야 연장근로가 가능하기 때문에 (탄력근로제 도입에 따른) 연장근로로 건강권이 침해돼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에 해당한다는 판례는 아직 없다”며 “다만 일반적으로 사업주가 연장근로를 지시했을 때 근로자가 거부하기가 쉽지 않고 특정 주에 과로할 가능성이 높아 노동자 건강권을 위협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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